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사업 진출을 앞두고 ‘노조 리스크’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길었던 반도체 한파 끝에 마주한 AI라는 새로운 시장 진출을 앞두고 노사 간 발생한 갈등으로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조(전삼노)에서 조합원 1만6562명(조합비 납부 기준)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쟁의 찬반 투표율이 전날 오후 3시30분께 80%를 넘겼다. 투표가 시작된 지 하루 만이다.
전삼노는 14일 열린 중앙노동위원회 3차 조정회의에서 ‘조정 중지’ 결정이 내려져 합법적 파업이 가능한 쟁의권을 확보했다. 삼성전자 노조가 파업에 나설 경우 1969년 창립 이후 처음이다.
노사 갈등의 가장 큰 이유는 성과급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사업이 사상 초유의 적자를 내며 성과급을 대폭 줄이거나 지급하지 않았다. OPI는 1년에 한 번 지급되는 삼성전자의 대표적인 성과금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DS 직원들은 지난 2022년에는 역대급 매출 달성으로 상한선인 연봉의 50%를 받았는데, 사실상 임금이 삭감된 것이다.
문제는 삼성전자가 AI 시장 진출을 앞둔 중요한 시기란 점이다. 삼성전자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총매출은 연결 재무제표 기준 14.3%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6조5670억원으로 전년대비 84.9% 감소했다. 당기순이익은 15조4871억원으로 전년대비 72.2% 감소했다. 올해 1분기도 4조5000억원 적자로 14년 만에 최악의 성적표를 받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AI는 삼성전자 실적을 견인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미래 먹거리로 평가받고 있다. 딜로이트가 발간한 ‘TMT 2024 예측 보고서’는 생성 AI 전용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24년 400억달러(한화 약 51조원) 수준에서 2027년 4000억달러(한화 약 516조원)까지 3년 만에 10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엔비디아에 HBM3를 독점 공급하고 있는 SK하이닉스의 주가는 크게 상승했다. 또 SK하이닉스가 현존하는 D램 중 최고 성능인 ‘HBM3E’를 세계 최초로 양산해 글로벌 빅 테크에 납품한다고 19일 발표한 만큼 삼성전자는 급해질 수밖에 없다. HBM은 D램을 수직으로 적층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향상한 제품으로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사용된다.
20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한 주주는 “SK하이닉스의 주가는 계속해서 오르는데 삼성전자의 주가는 지지부진하다”며 “원인이 HBM에 있는 것 같은데 삼성전자에서 HBM 준비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질의하기도 했다.
이에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전자는 AI 반도체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답했다.
삼성전자가 AI 사업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공일반지능(AGI)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하고 HBM3 다음 세대인 HBM3E 12단 생산 준비에 집중하는 등 AI 사업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연말까지 월 13만장 규모의 HBM용 TSV 생산능력을 갖출 계획이다.
또 AI 산업 거물로 부상하고 있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리는 'GTC 24'에서 삼성전자의 HBM을 테스트하고 있고 기대가 크다고 언급한 만큼 삼성전자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는 상황이다.
다만 노사갈등 리스크가 삼성전자 AI 시장 진입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당장 하반기부터 HBM3E 양산으로 메모리 주도권을 되찾아와야 하는 상황인데 노조 파업이 생산에 차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성전자는 창립이래 아직까지 파업을 겪은 적 없어 실제로 파업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피해가 일어날지 추정조차 힘든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AI 사업 전쟁에서 삼성전자가 TSMC나 SK 등 경쟁사들에 비해 겉도는 느낌이다”며 “내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AI 사업에 뛰어들 전망인데 여기 노조 총파업이 일어난다면 후발주자라 급한 상황에 생산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부회장은 노조 리스크에 대해 “언제나 대화의 창을 열어두고 소통에 임하여 노조가 파업에 이르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며 “다만 당사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파업을 할 경우 관계 법령이 서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경영 및 생산 차질을 최소화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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