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죄인몰이에 채용 겁내는 기업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죄인몰이에 채용 겁내는 기업들

[Le view<230>]-청년 울리는 현실괴리 법(法)(④-중대재해기업처벌법)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죄인몰이에 채용 겁내는 기업들

사업장 내 인명사고 발생 시 경영자·기업 처벌 기준 대폭 상향

르데스크 | 입력 2023.04.20 17:30

 

▲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각 기업에서는 혹시 모를 사고 우려에 사업장 내 근로자 수 늘리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안의 성격 자체가 사업장 내에서 사건·사고의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는 측면이 강해서다. 사진은 서울의 한 건설현장의 모습.(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뉴시스] 

 

근로자 안전을 보장한다는 선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불문명한 기준과 일방적인 책임전가성 처벌 내용 등으로 도입 초기부터 논란이 많았던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의 파급효과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의 안전 관련 시설·인력 투자, 사업장 내 위험요인 제거 등 일찌감치 예상됐던 파급효과 외에 고용 부문에도 중대재해법의 여파가 미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각 기업에서는 혹시 모를 사고 우려에 사업장 내 근로자 수 늘리기를 꺼려하는 분위기다. 신규 채용에 있어서도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는 가벼운 질병이나 질환조차 결격 사유로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법안의 성격 자체가 사업장 내에서 사건·사고의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는 측면이 강해서다. 잔뜩 움츠려든 고용 시장과 건강과 관련된 엄격한 기준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세대에게 심각한 악재가 되고 있다.

 

산업재해 발생 시 책임자 ‘상한선 없는 징역형’ 중대재해법 시행에 산업계 패닉

 

중대재해법은 지난 2021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 통과 후 이듬해인 2022년 1월 27일부터 시행됐다. 안전 관련 시설·인프라 투자 여력을 감안해 당장은 50인 이상의 사업장에만 적용됐고 오는 2024년 1월 27부터는 전 사업장으로 적용 대상이 확대된다. 중대재해법 시행으로 중대산업재해 또는 중대시민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다 하지 못한 이유라면 강도 높은 형법 기준에 따라 처벌이 이뤄진다.

 

유사 법안인 산업안전보건법에선 근로자 사망 사고 시 처벌 기준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인데 반해 중대재해법에선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이 적용된다. 징역형의 상한선이 없어지고 벌금 상한선은 대폭 늘었다. 손해배상도 산업안전보건법에선 따로 기준이 없는데 반해 중대재해법에선 손해액의 최대 5배 범위에서 배상 책임이 부과된다.

 

중대재해법은 법안 논의 단계부터 법안 통과, 시행 직전까지 상당한 잡음을 불러일으켰다. 엄밀히는 반발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사업장 내에서의 안전사고를 방지하고 근로자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법안 취지엔 동의하지만 이미 비슷한 법안이 시행되고 있는데다 안전 및 보건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고 관련 시설·인프라·관리인력 확보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 기업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

 

50인 이상의 사업장을 둔 주요 기업들은 중대재해법 통과 후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전 관련 조직에 임원급 인사를 배치했고 협력사에 대한 안전 관리를 위한 인력을 추가로 뽑았다. 안전 관련 시설도 추가로 설치하고 작업현장 내 위험요인 제거하는 등 만일의 사태 대비에 만전을 기했다. 모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사안들이다. 당시 정부도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적용 시점에 차이를 두며 이러한 반대 목소리에 일부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용시장에 불어 닥친 중대재해법 후폭풍, 신규채용 줄이고 건강관련 기준 대폭 높이고

 

 

▲ 중대재해법은 신규채용 규모 축소 뿐 아니라 채용 기준을 상향시키는 결과도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기업 중 상당수가 신규직원 채용 과정에서 평소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는 한편 가벼운 질병이나 질환 등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사진은 건강상태를 체크 중인 한 직장인의 모습.(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뉴시스]

 

주목되는 사실은 중대재해법의 여파가 기업 활동 외에 고용 부문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사업장 내에서의 사고, 즉 산업재해 자체가 아무리 조심해도 100% 예방을 장담할 수 없고 안전 및 보건확보 의무의 기준도 모호한 상황에서 처벌 수위는 높다보니 사고 확률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사업장 내 인력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잠재적인 피해자를 줄여 사고 발생 확률을 낮추겠다는 의도다.

 

경기도 소재 한 중소기업 대표는 “‘사고(事故)’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뜻 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하는데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뜻밖의 일이 일어나지 않겠나”라며 “어찌됐던 사고발생 확률을 최대한 줄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조심한다한들 찰나의 사고로 감옥에 가고 엄청난 배상 책임을 지어야하니 도대체 어떻게 기업을 경영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안전 관리 인력을 따로 확충하고 사고위험이 있는 시설에 경고문구, 안전바 등을 설치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게 사실이다”며 “결국 선택한 방법은 인명사고 방지를 위해 사람을 줄이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꾸준히 직원을 늘려 기존 직원의 업무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줬겠지만 지난해부터는 인원은 따로 늘리지 않고 빈자리만 충원하는 식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대재해법은 신규채용 규모 축소 뿐 아니라 채용 기준을 상향시키는 결과도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기업 중 상당수가 신규직원 채용 과정에서 평소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는 한편 가벼운 질병이나 질환 등에 대해서는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꼭 회사의 탓이 아니더라고 개인적인 질병이나 질환에 의한 사고라도 사업장 내에서 벌어지면 중대재해법 처벌 대상으로 내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건강검진 업체인 한국의학연구소(KMI)에 따르면 연간 채용 건강검진은 중대재해법 등장 이전인 2020년만해도 5만6636건이었지만 법안 통과 직후인 2021년엔 11월까지 집계된 수치가 7만4294건에 달했다. 김경연 KMI 직업환경의학본부장은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이 직원 건강관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재계,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한 대형 온라인쇼핑몰 업체는 배송기사 채용 시 심혈관계 관련 질병코드가 확인되면 채용하지 않고 있다. 한 외국계 대형 유통업체도 지원자가 채용 전 건강검진에서 재검 판정만 받아도 불합격 처리하고 있다. 이 밖에 국내 기업 중 상당수가 지원자에게 받은 건강검진 결과와 전문인 소견서를 다시 전문가에게 의뢰해 재검토 하는 식으로 신규 직원에 대한 건강상태 확인을 철저히 하고 있다.

 

▲ [그래픽=석혜진] ⓒ르데스크

 

한 식품업체 인사담당자는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공장은 물론 사무직 직원 채용 시에도 건강 관련 부분을 세밀히 살피고 있다”며 “어렸을 때부터 앓아온 가벼운 질환까지 꼼꼼히 살피고 특히 공장에서 물류를 담당하는 직원의 경우엔 심혈관이나 뇌혈관 질환 등은 물론 관련 가족력 여부까지 살피고 있다.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혹시나 모를 사고 발생 시 회사가 입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고 귀띔했다.

 

구직자들 역시 건강 관련 기준이 부쩍 높아진 것을 체감한다는 반응이다. 현재 한 제조업 공장에 재직 중인 한성우 씨(30·남)는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인 지난해 상반기 입사했는데 당시 채용 과정에서 건강 관련 부분을 유독 꼼꼼히 봤던 것 같다”며 “같이 입사 지원한 한 지원자는 평소 천식을 앓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지원자는 탈락했다. 스펙이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건강 부문에서 감점을 받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은진 씨(24·여)는 “예전에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기업들이 사람 뽑기를 꺼려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다”며 “그 전까진 법 내용에 대해 몰랐는데 막상 취직에 방해가 된다 해서 자세히 살펴본 결과, 일부 과한 측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부작용이 심하면 어느 정도 수정·보완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고 설명했다.

 

서진형 경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업무와 무관한 질병에 의한 사고마저도 회사 책임으로 판단되면 엄청난 후폭풍이 뒤따르다 보니 기업 입장에선 신규 채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근로자의 안전 보장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명확하고 합리적인 기준과 무조건 기업 책임으로 내모는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규제 피해는 갈수록 커질 것이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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