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직접 챙긴 재계의 딸들, 혹독한 능력검증 관문 남았다
밥그릇 직접 챙긴 재계의 딸들, 혹독한 능력검증 관문 남았다

 

▲ 최근 우리나라 재계에선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속화 된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승계를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직접 후계자로 나서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아직은 미비한 숫자이긴 하지만 보수적 색채가 짙은 우리나라 재계의 특성을 감안하면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로 평가된다. 사진은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진=아모레퍼시픽]

 

재계의 여성들이 달라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속화 된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승계를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직접 후계자로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진 남자 형제가 없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붙긴 하지만 고집스럽게도 남성 경영인을 선호했던 과거와 비교했을 땐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로 평가된다.

 

더욱이 경영승계에서 동 떨어져 있는 여성이 직접 분쟁까지 불사하며 지분을 확보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사례도 등장해 앞으로 여성 오너의 등장은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아직은 경영에 참여한 기간이 길지 않아 능력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풀어야 할 숙제로 지목된다. 성별을 떠나 기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례가 늘어야 비로소 ‘완벽한 변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아들 없는 뷰티·패션 기업 회장님 과감한 결단에 ‘여성 총수’ 등장 초읽기

 

재계 등에 따르면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오너 2세인 서경배 회장의 뒤를 잇는 3세 경영 준비가 한창이다. 경영권을 넘겨받을 유력 후보는 장녀인 서민정 씨다. 아들이 없는 서 회장은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을 예상했던 주변의 예상을 깨고 일찌감치 서 씨를 후계자로 낙점했다. 1991년생으로 올해 나이 32세인 서 씨는 미국 코넬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지난 2017년 아모레퍼시픽 경력직 평사원으로 입사하며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퇴사 후 다시 중국 유학길에 오른 서 씨는 장강상학원 경영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2019년 다시 회사에 복귀했다. 서 씨의 중국 유학은 아모레퍼시픽의 매출 의존도가 높은 중국시장에 대한 이해와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일종의 ‘후계자 수업’으로 해석됐다. 현재 서 씨는 아모레퍼시픽 럭셔리브랜드 디비전AP팀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안팎에선 큰 이변이 없는 한 서 씨가 차곡차곡 실무 경험을 쌓으며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일부 계열사의 지분을 확보하는 등 지분승계를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 중인데다 동생인 서호정 씨는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뷰티 업종의 특성 상 제품을 이해하고 고객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여성이 상대적으로 남성 보다 유리하다는 점은 전문경영인 체제 등 혹시 모를 변수 발생 가능성마저 낮추고 있다.

 

 

▲ 대상그룹은 여성 오너 등장이 기정사실화 된 상태다. 오너 2세인 임창욱 명예회장 슬하엔 두 딸이 있는데 모두 그룹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사진은 대상그룹 오너 3세인 임세령 부회장(왼쪽)과 임상민 전무. [사진=대상그룹]

 

‘미원’으로 유명한 식품특화기업 대상그룹도 여성 오너 등장이 기정사실화 된 상태다. 오너 2세인 임창욱 명예회장 슬하엔 두 딸이 있는데 모두 그룹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장녀인 임세령 대상홀딩스 부회장은 2012년 대상그룹 차장으로 입사해 실무경험을 쌓았다. 이후 주력계열사인 대상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상무) 직책을 맡으며 식품 브랜드 매니지먼트와 기획, 마케팅, 디자인 등을 총괄했고 지난 2021년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현재는 그룹 주요 사업 전반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임 명예회장의 차녀인 임상민 전무는 언니 보다 3년 빠른 2009년 대상그룹 전략기획팀 차장으로 입사했다. 2012년 부장 승진, 2014년 상무 승진, 2016년 전무 승진 등 언니와 달리 다소 느리긴 하지만 더욱 탄탄한 과정을 밟아 왔다. 특히 임 전무는 지주사인 대상홀딩스의 최대주주(36.7%)에 올라 있어 향후엔 그룹 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인물 1순위로 점쳐지고 있다. 언니인 임 부회장의 지주사 지분율은 17%다.

 

화장품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패션분야에서도 여성 오너의 등장이 두드러지고 있다. 물론 창업주 슬하에 아들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올해 초 쌍용건설 인수를 마무리하며 당당히 중견그룹 반열에 오른 글로벌세아그룹은 창업주 김웅기 회장의 차녀인 김진아 부사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다른 형제에 비해 그룹 경영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데다 유일하게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다.

 

노스페이스. 룰루레몬 등의 유명 브랜드를 보유한 영원무역그룹도 차녀 승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창업주 성기학 회장의 차녀인 성래은 부회장은 영원무역 사장으로 승진한 지 2년 만에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다른 기업과 달리 삼녀인 성가은 부사장도 경영에 깊게 관여하고 있어 성 부회장으로의 경영 승계를 100% 장담하긴 어렵지만 당장 역할만 봤을 때는 후계경쟁에서 한 발 앞서 있다는 게 관련업계의 시각이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우려의 시선…“여성 오너 성패에 여성 사원·임원 운명 달렸다”

 

남자 형제와 경쟁을 통해 기업의 후계자로 등극한 여성 기업인의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구지은 아워홈 부회장(대표이사)이 꼽힌다. 구 부회장은 형제 중 가장 먼저 경영에 참여한 장본인으로 한 때 ‘장자 승계 원칙’을 고수해온 범LG가의 관례를 깰 주인공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016년 범LG가의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경영활동이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던 구본성 전 부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구 부회장은 부친의 결정에 수긍하고 회사를 떠났지만 이후 구 전 부회장을 둘러싼 경영능력 부족 논란, 보복운전 혐의 기소, 방만경영과 배임·횡령 논란 등이 불거져 나오면서 결국 구 부회장과 나머지 형제들이 힘을 합쳐 구 전 부회장을 대표이사 자리에서 끌어 내렸다. 구 부회장은 공석이 된 대표이사 자리를 차지했다. 구 전 부회장은 아직까지 최대주주 지위를 가지곤 있지만 구 부회장에 대한 나머지 주주들의 신임이 두터워 앞으로도 구 부회장 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 경영권을 물려 받은 재계의 여성들에겐 앞으로 더욱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 바로 경영능력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남녀 구분이 사라지는 지금의 분위기가 언제 다시 바뀔 지 장담할 수 없는 탓이다. 만약 경영권을 물려 받은 오너 일가 여성들이 능력을 입증할 경우 평사원이나 임원 등의 직급에서도 여성에 대한 평가가 사뭇 달라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사진은 여성 임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는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사진=뉴시스]

 

재계 등에 따르면 여성이 가업을 물려받은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기업들은 타 기업에 비해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후계자로 발탁된 여성 오너 대부분 경영성과 측면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서다. 달리 보면 ‘어부지리’로 왕좌를 차지한 것처럼 보여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우려를 잠재우는 일은 경영을 물려받은 여성 오너들이 꼭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목된다. 남녀 구분이 사라지는 지금의 분위기가 언제 다시 바뀔 지 장담할 수 없는 탓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임원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딸이 가업을 물려받은 사례가 거의 전무하고 있다 해도 특정 사업을 물려받아 키운 신세계그룹 정도에 불과하다”며 “아모레퍼시픽그룹, 대상그룹 등도 기정사실화됐다 뿐이지 완벽하게 총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까진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많은데 여성 후계자들은 하루 빨리 대내·외적으로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여성시민단체 관계자는 “유독 보수적 성향이 강한 재계에서 여성이 후계자로 발탁되는 사례가 늘고 있는 상황 자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며 “앞으로 기업 경영에 있어 남녀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현재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여성 기업인들이 능력 있는 경영인으로 거듭나는 게 중요하다. 그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다면 임원이나 일반 평사원 직급에서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고 강조했다.

 

서진형 경인여대(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전문경영인 체제가 완벽하게 자리 잡지 못하다 보니 여전히 오너 경영을 우선시 하는 편이다”며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기업에서 딸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이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다만 아직까지 눈에 띌 만한 성공 사례가 거의 없다보니 여성 오너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며 “현재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여성 후계자들의 어깨가 무거울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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