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경고도 한 두 번이면 족하다
▲ 오주한 정치부장

분재(盆栽)는 중세부터 동아시아에서 사랑받아온 원예예술이다. 분재는 툭 튀어나온 잔가지들을 깔끔히 정리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야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고 비로소 상품가치가 생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민심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에 반(反)하는 요소들을 말끔히 정리해야 비로소 수권(授權)정당으로서의 장기적 생명력이 담보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정치’에만 혈안이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한 여당 최고위원이 근래 논란이다.

 

종회(鍾會‧225~264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인이다. 서예체인 해서체(楷書體)의 창시자 종요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위나라 정계의 거물 중 한 사람이었다. 종회의 이러한 권세 배경에는 집안의 후광, 그리고 타고난 ‘아부‧모함‧배신의 본능’과 ‘무능함’이 있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임관한 종회는 당시 조정 최고실세였던 조상(曹爽)의 심복 하안(何晏)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았다. 황족이었던 조상은 탁고대신(託孤大臣)으로서 젖먹이 천자 뒤에 서서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조조(曹操) 시절부터 끊임없이 조씨 일가의 견제를 받아온 백전노장 사마의(司馬懿)마저 그 무렵 사실상 좌천당한 상태였다. 자연히 조상의 세도는 하늘을 찔렀으며 하안은 이러한 조상으로부터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천거된 인물이었다. 이부는 관리임용 및 공훈‧봉작, 인사고과‧정무 등을 맡는 핵심부서다. 권력에 혈안이 됐던 종회에게 있어서 하안과의 교분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던 셈이었다.

 

하안‧조상이 권력욕과는 별개로 나라에 충성하는 유능한 인물이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사마의를 명예직인 태부(太傅)로 천거하고 권력을 오로지한 조상은 주색잡기에 빠져 살았다. 하안은 후일 청담사상(淸談思想)으로 명명된 사이비철학 맹신자였다.

 

청담사상가들은 노자(老子)의 무위지치(無爲之治‧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천하는 자연히 다스려진다)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곡해해 사치향락만을 즐겼다. 무위지치는 ‘다스림을 백성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무위지치의 긍정적 사례가 선사시대 전설상의 성군인 요(堯)임금이다. 그는 어느날 평상복 차림으로 순행에 나섰다가 한 농부가 신나게 땅을 두드리며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는 격양가(擊壤歌)를 부르자 무위지치가 실현됐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반면 청담사상가들은 일손을 놓은 채 오석산(五石散)이라는 마약에 취해 뜬구름 잡는 탁상공론만 늘어놨다. 남성이 여성복을 즐겨 입는가 하면 얼굴에 분을 바르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도 유행했다. 하안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청동거울에 비친 자신의 곱디고운 얼굴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막상 국가지대사가 닥치면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훗날 서진(西晉)의 태위(太尉‧국방부장관 격)이자 청담사상 일인자가 되는 왕연(王衍)은 북방 이민족들이 영가(永嘉)의 난을 일으키자 덜컥 겁이 나 대군을 버려둔 채 달아나다가 목이 떨어졌다. 이 어처구니없는 도주극의 구실은 “선임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기 위해서”였다.

 

하안 또한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세가 무색하게 대적 한 번 못해보고 삼족이 멸족됐다. 사마의는 조상이 어린 황제와 심복들, 조희‧조훈‧조언 등 조씨 일가, 친위병력을 모조리 이끌고 도성을 비운 사이에 전광석화로 거사를 일으켜 간단히 성공시켰다.

 

이렇듯 무능했던 이들은 ‘자기정치’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재능을 과시했다. 하안은 상전인 조상에게 아부코자 그의 고평릉(高平陵) 참배에 불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조상의 공덕을 칭송했다. 하지만 막상 사마의 앞에 끌려가게 되자 상전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며 제 목숨만 부지코자 했다. 하안은 평소에도 ‘개’라는 별칭이 따라붙을 정도로 자타공인 모함의 달인이었다.

 

종회도 조상‧하안 등에 의해 고평릉 참배에 호출돼 이들의 공덕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사마의 앞에 대령하게 됐다. 그러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주인을 팔고서 사마씨의 종복이 됐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이후에도 종회는 사마씨 정권에서 촉한(蜀漢) 정벌 일등공신이 되는 등애(鄧艾)마저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농민 출신으로서 원래부터 사마의 쪽 사람이었던 등애는 소수 결사대만 이끈 채 천길 낭떠러지를 구르고 굴러 촉한의 수도 성도(成都)를 함락한 명장이었다.

 

제 한 몸의 권세만을 위해 자기정치에만 충실했던 이들은 위나라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조상‧하안‧조상 등의 탐욕‧무능‧실언‧망동, 그리고 이로 인한 민심악화에 힘입어 고평릉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끈 사마씨는 조씨를 대신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영토 곳곳에서 관구검(毌丘儉)‧제갈탄(諸葛誕)의 난 등이 발발했다가 진압되면서 위나라 국력을 깎아먹었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은 결국 위나라를 뒤엎고 265년 서진을 건국했다. 간신들을 중용한 위나라는 건국 약 40년 만에 망국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사마씨 정권에서도 질긴 정치생명을 과시한 종회는 등애를 제거하고 대신 성도에 깃발을 꽂자 촉한 대장군 강유(姜維)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잘 되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못 돼도 촉 땅에서 (할거하며) 유비(劉備)처럼 될 수 있다”고 외치며 자기정치의 대미를 장식하려 했던 종회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사마씨 정권은 평생 일신(一身)의 안위에만 충실했던 그의 쿠데타에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종회는 끝내 어지러이 날아드는 창날에 찔리고 베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실언‧망동을 일삼으며 사도(邪道)의 길을 걷고, 오로지 자기정치에만 충실하면서 민심을 악화시켜 속한 조직을 좀먹는 이들이 새겨야 할 역사다. 여권에서는 이미 문제의 여당 최고위원을 두고 “그냥 제명하자”는 촉구가 거세진다. 경고도 한 두 번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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