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망언·망동 일삼는 정치의 끝은 정해져 있다
▲오주한 정치부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경구(警句)로 “먼저 사람이 되어라”가 있다. 여기에는 타인을 공격하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서 먼저 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러나 근래 우리 정치권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망언‧망동을 일삼거나 일삼았다는 의혹에 휩싸였으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버젓이 남에게 손가락질 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오를레앙(Orléans)의 처녀’ 잔 다르크(Jeanne d'Arc‧1412~1431)는 노도와도 같은 외침(外侵)으로부터 조국을 구한 프랑스의 구국영웅이다. 알자스-로렌 지방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목축‧바느질‧요리 등을 하며 집안일을 돕던 평범한 시골소녀였다. 중세유럽의 여느 농민들처럼 잔 다르크도 문맹이었다.

 

잔 다르크가 유아기였을 무렵 프랑스의 운명은 백년전쟁 막바지를 맞아 백척간두에 놓여 있었다. 적국 영국에서는 헨리 5세라는 인물이 프랑스 본토를 휘저으며 백년전쟁 판세를 뒤집어놓고 있었다.

 

실례로 헨리 5세는 1415년의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서 배가 넘는 병력의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6000~8000명 수준이었던 영국군 전사자는 100~600명에 그친 반면 1만4000~2만5000명 규모였던 프랑스군에서는 무려 6000명이 전사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샤를 6세 사망 시 자국 왕위를 헨리 5세에게 넘긴다는 굴욕적인 트루아(Troyes)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에 잔 다르크는 16세에 불과했던 1428년 분연히 떨쳐 일어나 쟁기를 내려놓은 채 왕궁으로 향했다. 엄청난 카리스마로 종군(從軍) 허가를 얻어낸 잔 다르크는 질 드 레(Gilles de Rais), 라 이르(La Hire) 등 쟁쟁한 귀족들을 거느린 채 갑옷과 검으로 무장하고서 1429년 4월 영국군에 포위된 오를레앙으로 진군했다.

 

전략요충지인 오를레앙 점령으로 백년전쟁을 끝내려 했던 영국군은 잔 다르크의 초인적인 공세 앞에 무너졌다. 약 반 년 동안 포위됐던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가 참전한지 불과 열흘 만에 해방됐다. 혜성처럼 등장한 잔 다르크의 명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적장을 생포한 파테(Patay) 전투, 전통적 대관식 거행지인 랭스(Reims) 탈환전 등에서의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트루아 조약은 백지화되고 샤를(Charles) 7세는 프랑스의 새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샤를 7세 일가, 특히 샤를 7세의 생모이면서 실세였던 이자보 드 바비에르(Isabeau de Bavière)는 잔 다르크를 정치적 위협으로 여기며 ‘내부총질’에 나섰다. 그는 잔 다르크에게 공공연한 음해를 가하면서 전쟁광으로 몰아갔다. 나아가 1430년 영국과 손잡은 부르고뉴(Bourgogne)파가 콩피에뉴(Compiègne)를 공격하자 아군 보급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적국과 합심해 잔 다르크를 제거하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잔 다르크는 200~400명의 병력만 이끈 채 부르고뉴파 저지에 나섰다. 첫 공세는 막아냈지만 이후 부르고뉴파의 증원군 6000명이 등장하자 중과부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휘하 병사들을 먼저 성 안으로 피신시킨 잔 다르크가 마지막으로 입성하려 하자 해자(垓子) 위에 놓인 적교(吊橋)가 누군가에 의해 돌연 끌어올려졌다.

 

화살을 맞고 낙마한 잔 다르크는 끝내 적군의 포로가 됐다. 그가 적진에 끌려가자 그제야 프랑스 지원군이 도착했다. 영국 측은 프랑스 왕실에게 “몸값을 낸 뒤 잔 다르크를 데려 가라”고 제안했지만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샤를 7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자보 드 바비에르가 아예 영국에 서한을 보내 잔 다르크 처형을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법정에 선 잔 다르크는 문맹이었음에도 이단심문관 수십 명의 유도질문들을 슬기롭게 받아쳤다. 교황청마저도 잔 다르크의 혐의점을 전혀 찾지 못한 채 무리한 재판임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들은 여성인 잔 다르크에게 남장(男裝)을 사실상 강요한 뒤 1431년 5월 화형에 처했다.

 

여장(女裝)남성‧남장여성은 중세유럽에서 중죄에 해당했으나 여성의 경우 순결을 위한 목적이라면 용인됐다. 스커트 차림으로 홀로 수감돼 거친 사내들 위협에 노출됐던 잔 다르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호소는 묵살됐다. 이 공개처형을 지켜본 많은 프랑스인들은 눈물 흘리며 화형 주동자들에게 “먼저 사람이 돼라”는 취지로 소리 높여 비난했다.

 

이자보 드 바비에르는 성접대를 받는 등 문란한 사생활이 당대에 이미 구설수에 올랐다. 심지어 샤를 7세가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닌 불륜의 산물이라는 의혹도 있었다. 그럼에도 잔 다르크를 적국에 넘겨 난잡한 여인으로 둔갑하게끔 한 이자보 드 바비에르는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최악의 악인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화형식 당시의 영국왕 헨리 6세와 그의 섭정(攝政)들은, 자국 백성들 입장에서는 ‘재앙’이었던, 잔 다르크를 철저히 제 권력욕에만 이용했다. 이들은 잔 다르크가 사망하자마자 트루아 조약을 들이밀면서 1431년 12월 파리에서 헨리 6세의 프랑스왕 즉위식을 열었다.

 

근래 우리 정치권에서 잔 다르크를 둘러싼 이자보 드 바비에르 모자(母子), 헨리 6세 무리의 문과식비(文過飾非‧제 잘못은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잘난 체를 함), 이단공단(以短攻短‧자기 결점은 돌아보지 않고 남을 비난함)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 당대표 출신 인사는 전당대회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아버지뻘의 자당(自黨) 중진급 인사에게 연일 날을 세우는 등 내부총질 비판을 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중진급 인사를 “꼰대”라고 지칭하거나 ‘엄석대의 체육부장’이라는 비아냥과 조롱을 일삼았다. 해당 인사는 정작 ‘성상납’ 의혹에 휩싸인 상태임에도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조차 없다.

 

일부 야당 의원들은 여당 소속 지자체장에게 도민 스포츠 구단 관련 의혹을 무차별 제기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정작 호남에 지역구를 둔 한 의원은 지난해 2월 온 국민을 재앙으로 몰고 간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 “여당(지금의 야당) 후보 찍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고 당국에 요구해 만인(萬人)의 귀를 의심케 했다. 영남에 지역구를 둔 또 다른 의원은 노동운동가라는 출신이 무색하게 2018년 12월 김포공항 직원들에게 갑질을 가해 빈축을 샀다.

 

문과식비‧이단공단의 한계는 분명하다. 의연히 죽음을 맞은 잔 다르크 처형 등 여파로 칼레(Calais)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내 영토를 잃고서 신경쇠약에 걸렸던 헨리 6세는 런던탑에 유폐됐다가 암살됐다. 만인의 증오 속에 말년을 보냈던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달리 잔 다르크는 세기의 성녀(聖女)로서 수백년 간 추앙받고 있다. 뒤늦게나마 잔 다르크의 명예를 회복시킨 샤를 7세는 정상이 참작돼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기에 문과식비‧이단공단격 언행은 제 자신의 얼굴에 먹칠만 할 뿐이다. 작금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새겨야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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