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한일정상회담과 실크로드 개척
▲ 오주한 정치부장

실크로드(Silk road‧비단길)는 근세 이전에 동서양을 잇는 교역로였다. 유럽‧중동 상인들은 비단‧차(茶) 등이 기다리는 동방의 엘도라도를 향해 장장 6400㎞ 길이의 실크로드를 걷고 또 걸었다. 나침반조차 없던 시절 이들은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자리만을 길잡이 삼아 오아시스로 목을 축이며 이란 고원, 중앙아시아 스텝(초원)지대,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었다.

 

실크로드를 건넌 대표적 인물이 동방견문록 저자로 알려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다. 갖은 보화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의 거리,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의 금빛 곤룡포는 멀리 서방에서 온 지친 이방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근세인 17~18세기에도 시누아즈리(Chinoiserie‧바로크 등 양식에 동양의 양식을 가미한 미술품)가 유행할 정도로 동방의 보물들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자연히 실크로드는 신라를 포함한 아시아 각 국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안겨다줬다. 

 

그런데 이러한 실크로드가 상상 못 할 치욕을 딛고 형성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건(張騫‧?~기원전 114년)은 전한(前漢) 시기의 탐험가‧외교관이다. 산골오지 한중 지역의 외딴 시골마을에서 일반백성으로 태어난 그는 흉노(匈奴)를 몰아내리라고 어려서부터 다짐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북방 유목민족으로서 거대 제국을 형성한 흉노는 당시 한나라를 반(半)식민지로 삼고 있었다. 기원전 209년 부친을 암살하고 흉노의 선우(單于‧황제)가 된 묵돌(冒頓)은 학살자로 악명 높았다. 코카소이드(백인)계 민족이 세운 서쪽의 월지(月氏), 퉁구스계 수렵채집 민족이 세운 동쪽의 동호(東胡) 등을 정복한 그는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묵돌은 초한전쟁으로 피폐해진 한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기원전 201년 만리장성을 넘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맞섰지만 강력한 유목기병을 당해내지 못하고서 백등산이라는 곳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한고조는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묵돌의 연지(閼氏‧황후)에게 한나라의 미인도를 보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미인도를 본 연지는 “한나라를 차지하면 선우는 필시 한나라 미인들을 총애하고 난 괄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묵돌에게 퇴각을 재촉했다. 부족연합 사회였던 흉노에서 연지는 두 번째로 큰 부족 출신이었고 자연히 그도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묵돌은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묵돌이 화친조약에서 내놓은 제안은 한나라에게는 실로 치욕적이었다. 묵돌은 한고조에게 “흉노가 형님이고 한나라가 동생이 되는 형제관계를 맺는다. 한나라 공주는 흉노 선우에게 시집와야 하며 한나라는 매년 흉노에게 산더미 같은 비단옷과 산해진미를 바친다”고 요구했다. 묵돌은 나아가 한고조 부인이었던 여후(呂后)에게 사자를 보내 “서로 가진 것으로 서로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떤가”라는 성희롱도 대놓고 자행했다.

 

흉노를 두려워 한 한나라는 사실상의 식민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흉노는 조드(Dzud‧한파)가 불어 닥쳐 가축들이 상당수 얼어 죽는 겨울이 되면 수시로 장성을 넘어 노략질을 일삼았다. 천고마비(天高馬肥‧가을이 되면 말이 살찌고 조만간 흉노가 온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흉노의 잔혹한 살인‧납치 행각 앞에 한나라 백성들은 치를 떨어야만 했다.

 

때문에 역대 한나라 조정의 최대 국정과제는 식민지배 청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유철(劉徹‧기원전 156~기원전 87년)은 곽거병‧위청‧이광 등 명장들과 함께 북벌에 나섰다. 또 흉노를 협공할 동맹국을 찾았으며 이 때 발탁된 게 장건이었다. 문무백관 중 이역만리 미지의 세상으로 떠나려 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일반백성 출신이었던 장건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팔을 걷어붙였다.

 

기원전 138년 흉노 출신의 가노(家奴) 감보(甘父) 등과 함께 수도 장안에서 출발해 대장정에 오른 장건은 우선 일리(Ili)강 유역의 월지 부락을 방문하려 했다. 당시 선우는 월지왕의 목을 벤 뒤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흉노에 대한 월지 백성들의 원한은 뼈에 사무쳤다.

 

하지만 장건의 여행은 초장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시대에 내비게이션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흉노에게 패한 뒤 월지의 소재지는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었다. 출발 전 한무제마저 “월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사신으로 가는 건 마치 은하수 끝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고 한탄하고 장건은 “마지막까지 은하수 끝에 가는 길을 만들다가 죽겠다”고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결국 흉노 지배영역에서 이리저리 헤매던 장건은 기습한 흉노 병사들에게 붙들려 군신(軍臣)선우 앞에 끌려가고 말았다. 군신은 “내가 한나라 남쪽의 월나라(南越‧지금의 베트남)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나라는 어떻게 하겠나”고 역정을 내며 장건을 억류했다. 심지어 그와 흉노 여성을 강제 혼인시키기까지 했다. 졸지에 장건은 흉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둔 채 무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적진에 남겨지고 말았다.

 

차라리 군신에게 목숨을 잃었다면 장건은 깨끗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배자에게 목숨을 구걸한 모양새가 돼 오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한나라 내부에서 “배신자” “친흉(親匈)파” “부역자” “겁쟁이” “사기꾼” 등 비난이 속출했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장건은 오로지 단 하나 서역과의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때로는 선우에게 고개 숙이고, 때로는 선우의 밥을 얻어먹으며 치욕을 견뎠다. 그리고 마침내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지자 그간 정든 흉노인 아내와 아들, 사냥으로 일가족을 먹여 살린 충직한 감보를 이끌고 즉각 흉노를 탈출했다.

 

추격병을 피해 십수일 동안 정신없이 내달린 장건은 중앙아시아 페르가나(Fergana) 지방에 위치한 대완(大宛)이라는 낯선 왕국에 도착했다. 동쪽의 한나라가 부강하다는 소식을 이미 접했던 대완왕은 장건을 융숭히 대접한 뒤 새 말(馬)과 통역관을 붙여 보내줬다. 장건은 이후 강거(康居)라는 나라를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마침내 월지의 소재를 접할 수 있었다.

 

월지에서 장건은 서방 문명과 조우한 최초의 인물이 됐다. 멀리 서쪽으로 이주해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 머무르던 월지는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정복한 상태였다. 이 대하는 바로 박트리아(Bactria), 즉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기원전 356년~기원전 323년)이 동방경략 과정에서 세운 국가였다.

 

비록 박트리아는 멸망했지만 밀로의 비너스상(Venus de Milo) 등 헬레니즘(Hellenism) 문화의 파편은 그대로 남아 있었을 터였다. 헬레니즘 미술은 훗날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돼 인도의 간다라 미술, 신라의 석굴암 등을 탄생시켰다. 이국적이면서도 기묘한 서방 문화를 처음 접한 장건이 느꼈을 충격과 전율이 어떠했을지 짐작된다.

 

서방의 귀중한 정보들을 간직한 채 13년만에 한나라에 귀국한 장건은 한무제에게 대하, 대완, 조지(條支‧시리아), 안식(安息‧파르티아) 등 서역의 크고 작은 왕국들과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상세히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체계적인 실크로드 개척의 시발점(始發點)이 됐으며, 치욕을 견딘 장건의 용기로 인해 동방은 마침내 큰 부를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는 또한 기원전 104년 실크로드를 따라 대완국을 정복한 뒤 수천 필의 한혈마(汗血馬‧아할테케)를 얻고서 북벌에 나섰으며, 이러한 장건의 헌신으로 인해 식민지배자 흉노는 끝내 악행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정상회담을 두고 야권에서 ‘굴욕외교’ 등의 비난이 쏟아진다. 하지만 약 2000년 전 한나라가 처한 상황에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입해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진정한 승리’를 위해선 때로는 순간적인 작은 굴욕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악적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장건은 흉노의 밥을 먹고 흉노와 악수하며 갖은 치욕과 모욕을 겪었지만 끝내 국민 모두를 위한 실크로드 개척이란 성과로 ‘극흉(克匈‧흉노를 넘어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대한민국에도 이와 같은 극일(克日)을 이루고 북핵 위협을 막아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작금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건 무분별한 반일(反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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