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난세가 영웅을 만든다
▲ 오주한 정치부장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 진나라의 전국옥새에 새겨긴 글자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영원히 번창하리라”는 뜻이다. 이 전국옥새는 진시황 때로부터 후진(後晉)의 출제(出帝) 때까지 무려 1000년 이상 제왕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난세에는 적과의 싸움은 물론 아군끼리의 음모‧견제‧배신도 난무한다. 민생은 실종되고 오로지 아귀다툼만이 벌어지는 난세는 반드시 큰 혼란을 잉태하고 지친 민심은 영웅을 요구한다. 노도처럼 쇄도하는 만인의 준엄한 명령 즉 천명(天命)은 영웅들로 하여금, 그 자신은 원치 않았더라도, 새 시대의 선도자로 우뚝 서게끔 한다.

 

천여불취 반수기구(天與不取 反受其咎‧천명을 거스르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라는 말처럼 역사상 수많은 난세의 영웅들은 뜻하지 않게 자신에게 지워진 발란반정(撥亂反正‧난세를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함)의 무거운 짐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후한(後漢) 초대 황제인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기원전 6년~서기 57년)는 민심의 정명(定命)을 받들어 신(新)나라 말기의 혼란기를 끝장내고 태평성세의 문을 연 대표적 인물이다.

 

유수가 태어난 시기의 세상은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난세 중의 난세였다. 전한(前漢) 말기 권신이자 역신이었던 왕망(王莽)은 자신의 파벌과 함께 한나라 조정을 장악하고서 천하를 농락하고 있었다. 기어이 서기 8년 정권교체‧찬탈에 성공해 신나라를 세운 그는 폭정을 일삼으며 민생을 도탄으로 몰고 갔다. 현실과 전혀 딴판인 탁상공론식 정책으로 물가는 폭등하고 기근이 이어졌으며 도처에서 굶어죽는 이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왕망은 권신 시절부터 ‘서민 코스프레’를 하거나 측근들을 시켜 ‘가짜 태평성대’ 소문을 퍼뜨리는 등 본시 쇼에만 능한 인물이었다. 전설상의 선양(禪讓)쇼를 처음 시행한 것도 그였다. 왕망은 최측근을 허수아비 황제에게 보내 자신에게 황위를 넘기라고 협박한 뒤 정작 황제가 면류관을 건네려 하자 세 번 거절하다가 끝내 “천자의 지엄한 명을 어길 수 없다”며 울면서 즉위했다. 때문에 천하백성들은 왕망에게 역적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대신 ‘선제(先帝)의 끈질긴 명령으로 억지로 옥좌에 앉은 충신’으로 오판하고 정권교체를 적극 지지했다.

 

제위에 오른 왕망이 서민‧충신의 마각을 걷어내자 비로소 백성들은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저항에 나섰다. 천하 각지에서 녹림(綠林)이라 불리는 민병대가 봉기해 왕망의 금군(禁軍)에 맞섰다. 전한 방계혈족이었지만 손수 장사해 학비를 마련할 정도로 가난했던 일개 유생(儒生) 유수도 형 유연(劉縯)을 따라 거병했다.

 

당초 유수는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든가 하는 거창한 꿈이 아닌 오직 순수하게 만민을 돕고 나라를 재건한다는 마음만 품고 있었다. 실제로 유연‧유수 형제는 정통성에서 앞서던 유현(劉玄)이라는 인물을 현한(玄漢) 경시제(更始帝)로 추대하고서 눈부신 황포를 입혔다. 그리고 자신들은 낡고 닳은 갑주를 걸치고서 한 자루 창과 함께 전선으로 향했다.

 

천하백성들이 유현을 천자로 떠받들고 칭송해도 유수는 조금의 불평도, 역심도 품지 않았다. 기록에는 명확하지 않지만 유수의 강직한 성품으로 미뤄볼 때 그가 실권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던 태상(太常)의 자격으로 유현에게 각종 충언을 쏟아냈을 것임은 분명하다.

 

전장터에서의 유수의 활약도 실로 놀라웠다. 서기 23년 신나라 장수들은 왕망의 명을 받들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곤양이라는 곳으로 진군했다. 곤양성을 지키던 유수의 병력은 수천에 불과했기에 좌우는 자연히 철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인근에서는 현한 주력부대가 신나라 성주(城主)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철수할 경우 아군 주력군이 수십만 적군에게 앞뒤로 포위돼 전멸당하고 현한은 멸망해 백성의 고통이 지속될 게 뻔했기에 유수는 “이곳을 사수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휘하 장수들에게 곤양성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한 유수는 10여기만 이끈 채 적진을 뚫고 나가 근처 군현(郡縣)을 돌며 필사적으로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한 탓에 그에게 합류한 신병은 수천(또는 1만)에 그쳤다. 설상가상 중과부적이었던 휘하 장수들은 신나라군에 항복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죽기를 각오한 유수는 3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그대로 수십만 신나라군에게 돌격했다. 머릿수만 믿고 자만하던 신나라군 대오는 거짓말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천지를 가르는 유수의 용맹 앞에 대군이 나타났다고 착각했다. 신나라군은 병장기를 내버린 채 어지러이 달아나면서 저희끼리 밟고 죽였다. 후세에 곤양대전(昆陽大戰)으로 명명된 이 전투는 신나라 패망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바야흐로 왕망의 폭정이 끝나가면서 국가재건의 희망이 싹텄다. 백성들은 정권교체가 완수되면 이제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가 가족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휩싸였다. 이러한 만인의 기대를 철저하게 산산조각 낸 건 다름 아닌 유현이었다.

 

유현은 정권교체에 큰 공적을 세운 유연‧유수 형제가 자신의 자리를 노릴 것이라 의심하면서 ‘내부총질’에 나섰다. 사소한 죄목을 구실 삼아 유연을 참살하고 유수의 목숨마저 노린 것이었다.

 

사심 없이 백성을 위해 복무한 유수의 명성은 이미 천하에 드높았던 터였다. 공신을 우대하기는커녕 자신을 황위에 앉힌 이를 토사구팽(兔死狗烹)한 유현의 배은망덕한 행위는 백성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 천하가 안정됐다면 조정에 귀순했을 터였던 각지 녹림들은 “저런 놈에게 귀순했다간 우리도 죽는다” “저런 놈도 황제인데 우리도 임금 한 번 해보자”며 도적떼‧반란군으로 변모했다.

 

왕망‧유현과 달리 애초부터 지존(至尊)이 될 생각이 없었던 유수는 결국 민심의 준엄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수병력을 이끌고 하북으로 향한 그는 여러 군벌‧도적떼들을 평정하고서 서기 25년 후한을 건국했다. 민심이반을 자초하고 명장마저 제 손으로 제거한 유현은 현한 수도 장안을 침략한 도적무리에 의해 무기력하게 폐위됐다가 살해됐다. 서기 36년 군벌 공손술(公孫述)의 성(成)나라 정복을 끝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마침내 한나라를 ‘진정으로’ 재건한 유수는 선정을 펼치며 광무중흥(光武中興)이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검게 드리운 난세의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쇼’에만 능하다는 지적과 함께 민생을 도탄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는 민주당계 정부는 국민의 심판 속에 막을 내렸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도 국민 근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악화된 민생지표마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여권 내 ‘내부총질’이 민심을 악화시킨다는 우려가 고조된다. 여당 맏형으로 평가받으면서 중도층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고, 정권교체에 큰 역할을 하고서 정권교체 후 각종 충언을 쏟아냈던 한 인사에게 돌아온 건 당 지도부의 ‘해촉’이었다. 일각에서는 해촉 배경에 해당 인사의 차기 대선 출마설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당 지지율 하락 배경 중 하나가 토사구팽이라는 취지의 여론조사 결과가 최근 나온 바 있다(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토사구팽에 따른 민심악화가 지속되는 한 유현에게 핍박받은 유수와 같은 새로운 영웅, 새로운 리더의 출현을 요구하는 국민의 준엄한 목소리가 고조되는 건 불가피하다.

 

어쩌면 새 영웅에 대한 열망은 여당 지도부의 행위가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진리를 그들은 망각해선 안 된다. 늦은 대로 여당 지도부는 내부총질 논란을 야기하는 대신 단합‧민생에 힘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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