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널 잊을까”…가해자 처벌에 학폭 피해자 보호 ‘뒷전’
“언젠간 널 잊을까”…가해자 처벌에 학폭 피해자 보호 ‘뒷전’
▲ 국내 학교폭력 피해자 치유 관련 시설과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정순실 아들 사태와 더 클로리로 학교폭력 문제가 도마위에 올랐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사진은 국내 유일 피해자 전문 치유 기관 '해맑음센터' 전경. ⓒ르데스크

 

“나도 언젠가는 너의 이름을 잊고 너의 얼굴을 잊고 어디선가 널 다시 만났을 때 누구더라? 제발, 너를 기억조차 못 하길”

 

드라마 더글로리에 학교폭력(학폭) 피해를 입은 문동은과 학폭 피해자들의 바라는 소원이다. 한번 패인 학폭의 흉터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갈수록 교묘해지고 심각해지는 학교 폭력에 피해자는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이를 보듬어줄 치유시설과 프로그램은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와 사회는 학폭 가해자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피해자에겐 무관심하다. 학교폭력심의위원회는 피해자를 위해 전문가 심리상담과 조언, 보호조치, 치료 및 치료를 위한 요양 등 조치할 의무가 있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매뉴얼은 전무하다. 피해자를 위한 보호·치유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방치되는 학교폭력 피해자들…예방·대책·처벌까지 ‘가해자’ 위주

 

이기현(24·가명)씨는 고등학교 때 학폭에 시달렸다. 물리적 폭력은 없었지만 자존감을 갉아먹는 언어폭력과 은연중 깔린 조롱과 멸시, 따돌림을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유는 없다. 단지 키가 작고 왜소하고 순하다는 이유로 또래집단에게 얕잡아 보인 게 이유라면 이유다.

 

학교폭력을 당하기 전 이 씨는 공부를 잘하던 학생이었다. 전교 10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고, 가고 싶은 대학과 꿈을 위해 학업에 열중했던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학폭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졸업 후에는 대학 대신 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3년간 아물지 않는 상처 가지고 홀로 방에서 아파했다.

 

현재 이 씨는 외국 명문 대학에 합격해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기본기가 탄탄해 오랜 공백기에도 독학을 통해 외국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이 씨가 상처를 가지고 학폭을 극복하기까지 가족을 제외하고, 국가와 학교 등 그 어느 곳도 이 씨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 국내 학교폭력 전담 기관중 가해학생을 전담하는 기관은 6000개다, 반면 피해자를 위한 기관은 149곳에 불과하다. 사진은 해맑음센터에서 찍은 주변 환경, 대전에서도 외각 변두리로 한참을 들어가야한다. 주변에는 버스정류장도 없고 택시도 부르기 힘들다. ⓒ르데스크

 

이 씨는 “내가 이런 인터뷰를 하게 될지 생각도 못했다, 아마 이 인터뷰를 끝으로 그 기억은 이제 내 인생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생각이다”며 “내가 괴로울 때도, 도와달라 요청했을 때도, 홀로 아파할 때도 가족 말곤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한국은 내게 괴로운 나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고 말했다. 이 씨는 대학 졸업 후 일을 하면서 영주권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내 학교 폭력 예방·대책은 가해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국회에 제출된 학교폭력 법안들도 가해학생 처벌을 위주로 대책이 마련되고 있다. 국회에 계류 중인 학교폭력 법안은 총 42건이다. 이중 대부분이 ‘가해자 생기부 기록 기한 증가’, ‘학폭 징계로 대학 지원 점수 깎기’ 등 가해자 처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피해자 치유·보호 법안은 단 두건에 불과했다. 가해학생 처벌 강화는 당연하지만, 국회에서도 피해자들을 위한 치유·보호는 법안은 후순위로 밀렸다.

 

피해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국내 학교폭력 치유센터 ‘한 곳’ 불과

 

교육부에서 발표한 ‘학교폭력 및 대책 시행 계획안’에 따르면 전국 가해학생 전담기관은 6000여곳인 반면 피해 학생 전담기관은 149곳이다. 그 중 피해자들만을 위한 전문 기숙 학교는 ‘해맑음센터’ 단 한 곳뿐이다.

 

김소열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사무국장은 “국내에서 학폭 피해자를 위해 지정된 장소들은 정신병원이나 한의원이라서 사실상 피해자 전담 치유기관으로 보기 어렵다”며 “학폭 피해자 전담 치유기관은 우리 단체가 운영하는 해맑음센터가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말했다.

 

해맑음센터는 2013년에 개교해 지금까지 335명의 피해자를 치유해 왔다. 교육·치유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학폭 피해자들을 위해 짜여 있다. 기본적인 적응 프로그램부터 기본교과, 심리상담, 체험활동 등을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 해맑음센터는 낡고 오래되 붕괴위험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지원 조치가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 입학생들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어 임시로 마련된 관사에서 지내야 한다. 사진은 해맑음센터 기숙사 내부로 지금은 붕괴 위험으로 폐쇄된 상태다. 기자가 직접 들어갔을때 건물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르데스크

  

또한 선생님과의 데이트나 지역 연계 활동 등 해맑음센터에서만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센터 측은 선생님과의 데이트 프로그램이 특히 인기가 많고, 많은 아이들이 어른과 사회 나아가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밝혔다. 센터를 거친 학생들 중 96.1%가 학교로 돌아갔고, 대다수의 아이들이 일상을 되찾았다. 학폭 피해자들에게 치유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김서영 해맑음센터 교사는 “지난해 수료한 학생으로부터 얼마 전 새 학기가 시작됐고, 친구를 사귀었다는 문자를 받았다”며 “정말 기분이 좋았지만, 내 궁극적인 꿈은 아이들이 학폭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나에게 연락조차 안 하고 행복하게 일상을 사는 것이다”고 말했다.

 

노후된 건물·열악한 환경…시·도교육청 무관심에 방치된 ‘해맑음센터’

 

기자가 찾은 해맑음 센터는 대전역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가는 길부터 외진곳에 위치해 있다. 대전 변두리에 낡디낡아 무너져 내리는 학교, 그럼에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해맑음센터는 국내 피해자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다.

 

김서영 교사는 “기존 오래된 폐교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리 꾸며도 노후된 모습을 감추기 힘들다”며 “단층 건물에 교실도 적어 치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지난해 10월 해맑음센터 기숙사는 안전 D등급을 받고 폐쇄된 상태다. 교사들이 사용하던 관사를 이용해 겨우 학생들을 받고 있다. 국내 학폭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치유와 보호를 받지 못한 것과 비슷하게 해맑음센터도 열악한 환경에 방치된 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 해맑음센터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서영 교사는 “현재 기숙사와 강당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 학생들이 지낼 공간이 마땅치 않다”며 “빨리 이전할 곳이 정해져야 하는데 최대한 많은 학폭 피해자들이 올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해맑음센터측은 더 많은 피해학생을 받고자 서울로 이전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사진은 해맑음센터 기숙사 건물 외부 모습으로 바닥 부분이 갈라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르데스크

 

해맑음센터측은 붕괴 진단을 받고 이전을 준비 중이다. 다만 시·도교육청이 선정한 최종 후보지들은 기존 건물과 다를 바 없이 낡았고, 접근성은 오히려 더 안 좋다. 그래서 센터 측은 더 많은 피해 학생들을 받을 수 있게 서울시 이전을 요청했지만 서울시는 이를 거부했다.

 

서울에 이미 위드위(With Wee)센터를 비롯해 피해자 지원체계가 구축돼 있단 이유에서다. 서울시는 “학폭 피해 학생을 위한 기숙형 기관인 해맑음센터가 굳이 서울에 구축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서울시가 주장하는 피해자 지원체계는 온전히 피해자를 위하진 않는다. 서울시에 위치한 위드위 센터와 위스쿨 등은 가해자, 문제아 등 위기청소년들도 담당한다. 그래서 피해자가 학폭으로 해당 기관에 찾아갔을 때 가해자를 만나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 교사는 “해맑음센터는 피해자들에게 있어 마지막 안식처와 같다. 서울에서 학폭을 극복하기 위해 위드위센터를 찾았던 한 학생은 거기서 가해자를 만나 치료를 포기하고 우리 센터를 찾아 왔다”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치료받는다는 것만으로 피해자에겐 또 다시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고 꼬집었다. 

 

실제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학교는 의무적으로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피해 치료 시설을 안내해야 하는데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학폭 피해자가 치유받을 권리마저 현실에선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폭력 피해 자녀를 둔 학부모 이서영(46·가명)씨는 스스로 해맑음센터를 찾아야만 했다. 이 씨는 “조금 더 이런 기관을 일찍 알았다면, 우리 아이가 덜 아팠을 것이다”고 말했다. 학교폭력으로 최근 자퇴한 채병헌(15·가명)군 또한 자퇴를 선택할 때까지 끝내 해맑음센터란 곳에 대해 안내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박애리 순천대학교 사회서비스상담 교수와 김유나 유한대학교 교수 연구팀이 발간한 ‘아동기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초기 성인기 심리 정서적 어려움 및 극단 선택에 미치는 영향’ 논문에 따르면, 학폭을 경험한 적 있다는 대학생의 54.4%가 극단적 생각을 해봤고, 13%는 시도까지 해봤다고 답했다. 또한 학폭 피해를 경험한 대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극단적 선택할 가능성이 2.55배나 높았다.

 

이는 학폭 피해자들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하고 오래가는지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학폭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피해자들의 치유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피해자가 뒷전이 되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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