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민주당의 자충수 된 당대표 방탄
[데스크칼럼]민주당의 자충수 된 당대표 방탄
▲ 오주한 정치부장

예루살렘왕국은 서기 1099년 십자군 원정을 통해 레반트 지역에 건국된 왕국이다. 이 왕국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기독교 공인을 골자로 하는 로마제국의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 공포로부터 약 800년만에 성지(聖地) 예루살렘에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예루살렘왕국은 증오의 정치, 혼군(昏君)과의 동거라는 자충수로 말미암아 성지 상실이라는 대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1186년 예루살렘왕국 국왕에 즉위한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은 프랑스의 십자군기사 출신이다. 아키텐 공국에게 종속된 뤼지냥가의 후손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동네건달’로서 악행이 자자했다. 대표적 사건이 1168년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솔즈베리 백작 테러였다.

 

기와 일당들은 잉글랜드왕국 대귀족이었던 백작을 엄습해 목을 벤 뒤 그 일행들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백작은 프랑스왕국 국왕 루이 7세의 왕비 출신으로서 아키텐 공작, 잉글랜드왕국 국왕 헨리 2세의 왕비를 겸하고 있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를 호위하던 와중이었다. 자연히 기의 테러는 국가에 대한 중차대한 반역행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인이었던 기가 영국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키텐 공국은 프랑스 영토 내에 있었음에도 잉글랜드왕국의 앙주제국(Angevin Empire) 일원으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백작 습격 원인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점, 또 백작 일행들을 ‘엄숙히 처단’하는 대신 ‘납치’했다는 점에서 단순 ‘노상강도’ 행위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세유럽에서는 돼먹지 않은 시비를 걸어 상대를 포로로 잡은 뒤 본가(本家)에 사기‧협박을 가해 몸값을 받아내는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제값을 받지 못하면 포로는 그대로 살해됐다. 실제로 기가 훗날 보여준 막장행보는 정의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기는 명분 없는 솔즈베리 백작 살인사건으로 대노한 아키텐 공작에 의해 프랑스에서 전격 추방됐다. 천하 각지에서 유랑걸식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왕국에까지 도달한 기는 앞서 터를 닦아놨던 형제의 도움을 받아 왕국의 가신이 됐다.

 

당시 예루살렘왕국 국왕이었던 보두앵 4세(Baldwin IV)는 중증의 한센병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슬기롭게 지켜낸 명군(名君)이었다. 그의 능력과 인품은 숙적 살라딘(Saladin‧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마저 인정하고 존경할 정도였다. 반면 보두앵 4세의 누이 시빌라(Sibylle)는 희대의 미남인 기를 보자마자 혹할 정도로 평범한 여인이었다.

 

이후 시빌라의 행보는 마치 오늘날의 ‘개딸(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강성지지층)’을 연상케 했다. 기의 현란한 언변에 넘어간 보두앵 4세도 처음에는 기를 눈여겨봤다. 누이가 청상과부가 되자 보두앵 4세는 트리폴리 백작 등 봉건제후 수장들과 재혼시키는 대신 프랑스‧잉글랜드와 일정 부분 연관이 있는 기와 연결시켜줬다. 병세가 악화되자 보두앵 4세는 아예 기를 섭정(攝政)에 임명했다.

 

그러나 기는 권세를 얻자 과거의 본색을 드러냈다. 보두앵 4세는 마치 오늘날의 여야 협치(協治)처럼 강력한 군세를 기르면서도 무슬림의 성지순례를 용인하는 강온정책을 통해 성지를 지켜내고 있었다. 유럽에서 한참 떨어진 아랍 한복판에 속칭 ‘알박기’를 하고 있는 예루살렘왕국으로서는 전 아랍을 상대할 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두앵 4세는 나아가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적잖은 무슬림으로부터 호감도 사고 있었기에 살라딘은 함부로 거병(擧兵)하지 못했다.

 

반면 기는 호전적이었던 안티오키아 공작 르노 드 샤티옹(Renaud de Châtillon)과 손잡고서 휴전협정을 파기한 뒤 상단들을 습격해 모조리 학살하고 재물을 갈취했다. 합리파였던 구호기사단 등과 달리 마치 민주당 강성모임 ‘처럼회’처럼 무조건적인 ‘이교도 척살(적폐청산)’을 주장했던 성전기사단 등도 기를 지지했다. 성전기사단은 피로서 얻어낸 성지의 재물을 바탕으로 훗날 유럽의 거대 금융기관이 되기도 한다.

 

비로소 성지탈환 명분을 얻은 살라딘이 아랍의 여러 제후를 소집해 대군을 일으키자 보두앵 4세는 가누기조차 힘든 몸을 움직여 출병해야만 했다. 천우신조로 별다른 충돌 없이 살라딘의 철군(撤軍)을 이끌어낸 보두앵 4세는 즉각 기를 섭정에서 해임했다. 또 누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보두앵 5세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병세가 악화된 보두앵 4세가 사망하자 즉위한 보두앵 5세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1186년 요절했다. 기와의 이혼을 조건으로 예루살렘왕국 여왕에 오른 시빌라는 왕관을 쓰자마자 기와 재결합했다. 나아가 선왕(先王)의 유훈마저 어기고서 이미 푹 빠져 있던 기를 왕위에 세웠다. 끝내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기는 또다시 기사단을 이끌고 민간인 학살에 나섰다.

 

이렇듯 위험한 범죄자를 리더로 택한 예루살렘왕국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사막에서는 무엇보다 수원(水源)을 찾아 거점화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무능하고 탐욕스러웠던 기는 1187년 하틴(Hattin)전투가 벌어지자 재물에 눈이 멀어 무리를 이끌고 오로지 돌격했다. 2005년작 헐리웃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 하염없이 진군하다가 자멸한 십자군이 적의 한 번 공세에 패퇴하는 것으로 이 전투의 결말이 묘사된다.

 

보두앵 4세 사후 한 줌 부귀영화를 위해 누군가에 대한 증오만을 선동하면서 이에 걸맞은 기를 리더로 삼았던 예루살렘왕국은 성지 예루살렘마저 빼앗기고 무너졌다. 돌투성이의 팔레스타인 해변가로 쫓겨난 왕국은 1229년 6차 십자군에서의 외교를 통한 반쪽 탈환 때까지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못했다.

 

“왕은 왕을 해치지 않는다”는 중세의 불문율에 따라 살라딘의 포로가 됐다가 풀려난 기는 왕위마저 잃고 말았다. 이후 그는 참회하는 대신 지중해 동부의 작은 섬 키프로스의 도적으로 전락했다. 기의 열성지지자였다가 마찬가지로 포로가 된 르노 드 샤티옹은 학살에 가담한 추종자들과 함께 단칼에 참수됐다. 시빌라는 기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과 함께 1187년 3차 십자군원정에 동참했다가 전염병에 걸려 쓸쓸히 사망했다.

 

이재명 대표 사법리스크를 둘러싼 민주당의 위기를 두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상대적 상위계층에 대한 하위계층 분노를 자양분 삼아 부귀영화를 누리려 한 증오의 정치 등이 잉태한 자충수라는 것이다. 이에 당 안팎에서 이 대표 ‘결단’ 촉구가 이어지지만 169석인 민주당은 최근 국회 본회의에서의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가결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이는 결국 민심이라는 성지 대신 그릇된 지도자와의 공멸을 택한 예루살렘왕국 전철을 끝내 밟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이 대표 구속수사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과반에 가까웠다고 한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러한 민심에 역행하는 한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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