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너무 당해서…올해는 무계획이 계획이에요”
“작년에 너무 당해서…올해는 무계획이 계획이에요”

[지금 대한민국<156>]-청년세대의 신년맞이(上) “작년에 너무 당해서…올해는 무계획이 계획이에요”

작년 경기침체, 대형참사, 정책지연 등에 신년계획 줄줄이 무산

르데스크 | 입력 2023.01.02 14:44

 

▲ 최근 ‘무계획이 진리’라는 인식이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의 불확실성이 커질 대로 커진 지난해의 학습효과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사진은 한 대형서점 내 다이어리 매대의 모습. [사진=뉴스1]

 

새해가 밝았지만 올해는 예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 해 계획을 세우기 바빴던 과거와 달리 ‘무계획이 진리’라는 인식이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의 불확실성이 커질 대로 커진 지난해의 학습효과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대다수의 청년들은 뚜렷한 계획을 세워봐야 무의미하다며 올해는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입을 모았다.

 

참사 직격탄 맞은 자영업자, 고금리에 허덕이는 직장인 모두 “올해 목표는 버티기”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하준석 씨(37·남·가명)는 지난해 봄 매장 리모델링을 실시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잠잠해지면서 이태원을 찾는 유동인구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미리 매장공간을 넓혀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3000만원 가량을 들여 테라스를 만들고 손님 테이블도 5개 가량 추가로 놨다.

 

올해 상황을 봐서 내년에는 인근에 다른 매장도 추가로 열 계획이었다. 여름까지만 해도 하 씨는 매장 확대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을 크게 만족했다. 이태원을 찾는 유동인구가 늘면서 매장 손님이 크게 늘었다. 여름 장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이후 가을 무렵 내년 계획을 앞당겨 인근에 새로운 매장을 알아보고 어느 정도 가격협상까지 마쳤다.

 

그런데 지난 10월 30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이후부터 이태원을 찾는 유동인구가 뚝 끊겼다. 하 씨의 매장 역시 하루 매출 ‘0’원인 날이 허다했다. 하 씨는 매장을 추가로 오픈하겠다는 계획도 전면 철회했다. 지금이야 벌어놓은 돈을 까먹으며 매장을 유지하곤 있지만 돈을 다 소진하고 나면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이다.

 

하 씨는 “올해는 신년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며 “백날 계획을 세워봐야 또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를 뿐더러 지금 상황에선 계획을 세워도 시행할 여력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지금 같아선 올해는 또 어떻게 버틸지 막막하다는 생각뿐이다”며 “평생 이렇게 허무하고 무기력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부연했다.

 

 

▲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하준석 씨(37·남·가명)는 당초 매장을 추가로 오픈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태원 참사 이후 계획을 전면 철회했다. 매출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하 씬느 당장 벌어 놓은 돈을 다 소진하고 나면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이다. 사진은 이태원 소재 한 주점의 모습. ⓒ르데스크

 

서울의 한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이민기 씨(33·남)는 재작년 초 경기도 고양시 소재 오피스텔 한 채를 매입했다. 주변에서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리다 보니 나만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존에 부동산 투자에 뛰어든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듣고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아 간신히 매입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이 씨는 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매입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세가 많이 올라 대출금을 갚고도 어느 정도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같아선 같은 방식으로 몇 채를 더 매입하면 남들이 이야기 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이 씨는 여름쯤 오피스텔 한 채를 더 매입하기로 계획하고 적당한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평일 퇴근 이후나 주말 수도권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부동산 투자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 씨는 오피스텔 추가 매입하겠다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부동산 경기가 악화되면서 기존 오피스텔 시세가 급락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리마저 껑충 뛰어 이자부담이 커졌다.

 

이 씨는 오피스텔 추가 매입은커녕 현재 보유한 오피스텔 이자부담에 허덕이는 처지에 놓였다. 연초 세운 부동산 투자 계획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기존에 사놓은 오피스텔을 팔자니 세금과 그동안 쏟아 부은 이자를 빼고 나면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에 팔수도 없었다. 새해가 밝았지만 이 씨는 신년계획은 커녕 당장 올해는 어떻게 버틸지가 고민이다. 이자가 더 오르는 것도, 어디까지 오를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암담하기만 하다.

 

이 씨는 “요즘 같아선 신년 계획이나 포부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며 “백날 계획을 잡고 노력해도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무산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기 십상인데 ‘무엇 때문에 아등바등 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앞으론 계획 대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살 생각이다”며 “어떤 목표가 있어야 계획도 세울 텐데 지금은 버티며 살아가는 게 목표다”고 푸념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무기력감에 빠진 청춘들

 

최근 청년세대 사이에선 열정적인 삶을 뜻하는 ‘갓생’ 대신 그냥 되는대로 살자는 의미의 ‘걍생’이라는 신조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기존에 계획했던 일이 줄줄이 무산 된데다 곧장 찾아온 경기침체로 계획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누적된 실패감과 갈수록 커지는 불확실성이 무력감으로 이어진 모습이다.

 

서울 4년제 대학교에 재학 중인 김희정 씨(21·여)는 “나는 소위 말하는 코로나 학번인데 매년 신년 계획을 세울 때 마다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며 “대학교에 입한 후 기억에 남을만한 일도 없었고 자기계발도 제대로 된 게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럴 때마다 계획을 못 지켰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히려 무기력함만 들었다”며 “그래서 올해부터는 그냥 무계획으로 살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 최근 청년세대 사이에선 열정적인 삶을 뜻하는 ‘갓생’ 대신 그냥 되는대로 살자는 의미의 ‘걍생’이라는 신조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기존에 계획했던 일이 줄줄이 무산 된데다 곧장 찾아온 경기침체로 계획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고용보험센터 실업급여 창구의 모습. [사진=뉴스1] 

 

서울의 한 디자인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홍미정 씨(여·28)는 “중학교 때부터 새해가 오기 전에 다이어리를 꼬박꼬박 샀는데 올해는 사지 않았다”며 “계획을 세우면서 이뤄나갈 생각에 행복해야 하는데 최근 몇 년 동안은 불가항력적인 상황 때문에 지키지 못한 계획을 못 지키다 보니 이젠 계획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 뿐이 들지 않는다”고 전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어떠한 목표를 이루려는 것인데 이런 과정이 사라지다 보면 사회 전반에 걸쳐 무기력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난해 많은 사람들이 경기침체, 이태원 참사 등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확실히 경험했다”며 “불확실함은 삶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해 신년에 대한 기대감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은 벗어날 수 없음과 변화 없음에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엇이라도 해서 스트레스에서 탈피하는 순간의 경험을 뇌가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그래야 이후 유사하거나 심지어 더 큰 스트레스를 경험할 때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다시금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열심히 노력하고 달렸는데 기대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노력한 만큼 실망하게 되고 정서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며 “이럴 때는 목표 달성도 중요하지만 자기 주변을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 목표가 아닌 매일매일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목표를 단기적으로 세워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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