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내부총질‧배신정치‧안하무인의 말로
[데스크칼럼] 내부총질‧배신정치‧안하무인의 말로
▲ 오주한 정치부장

공동체에 저지른 제 잘못은 알지 못한 채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 아군 등에 칼을 꽂는 인물들이 고래(古來)로 존재해왔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이자 군인이었던 알키비아데스가 대표적 인물이다.

 

알키비아데스는 거부(巨富)였던 클레이니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가‧재력가 출신으로서 호화찬란한 삶을 즐기며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그는 기원전 432년 전쟁에 첫 출전해 공을 세우는 등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했다.

 

처음에는 이 어린 영웅에 대한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부잣집 도련님으로서 주변의 칭송에만 익숙해져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반대가 난무하는 현실정치에 적응하지 못했다. 또 지나친 오만함과 방탕함으로 인해 인망(人望)을 잃어갔다. 안하무인이던 그는 각종 그리스의 신(神)들을 모욕하는 등 사회적 금기도 건드렸다.

 

내부총질은 결국 화가 되어 돌아왔다. 서른 남짓한 나이에 스파르타의 동맹국 시라쿠스 원정군을 이끌게 된 알키비아데스는 신성모독죄로 체포돼 재판에 회부되는 신세가 됐다. 함대 출정 전날 누군가에 의해 신전이 훼손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평소 안하무인이던 그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평소 언행에서 비롯됐음에도 알키비아데스는 참회하거나 자숙하는 대신 탈옥해 국경을 넘었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아테네의 숙적’ 스파르타였다. 조국의 철천지원수에게 투항한 알키비아데스의 첫마디는 “나를 받아준다면 지금까지 준 피해보다 훨씬 큰 이익을 얻게 해주겠다”였다. 조국 아테네를 ‘멸망’시켜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원정군의 기밀을 모조리 불었다. 신난 시라쿠스는 그의 조언에 따라 촘촘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알키비아데스는 나아가 스파르타도 파병한 뒤 원정군 함대를 파괴해 아테네군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고 꾀었다. 기원전 413년 시라쿠스를 공격한 아테네군은 알키비아데스의 덫에 결려들었다. 적진에 고립된 채 병력 4만~5만이 궤멸당하고 사령관 니키아스 등이 전사하는 재앙적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도 내부총질 본색을 드러냈다. 호색한이던 그는 은혜도 잊어버린 채 무려 스파르타의 왕비 티마이아와 간통을 벌였다. 유일한 스파르타 왕자였던 레오티키다스가 불륜의 산물이라는 소문까지 퍼질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공공연히 지속됐다. 발각 후 달아난 알키비아데스는 이번에는 다시 ‘아테네’에 붙어 스파르타에게 칼을 겨눴다.

 

잇따른 배신의 말로는 처참했다. 기원전 406년 스파르타와의 전투 패배 책임을 지고 아테네에서 추방된 알키비아데스는 야인(野人)으로서 은둔했다. 아테네가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에게 승리함에 따라 알키비아데스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점이 입증되기도 했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린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장성들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두는 등 정계복귀를 꿈꿨지만 이미 그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 붙어 어제의 동지 등에 칼을 꽂아대던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로 도주했지만 끝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간통 사건에 이를 갈던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장군 파르나바조스에게 암살을 의뢰했다. 자택이 화마(火魔)에 휩싸이자 알키비아데스는 황급히 탈출했지만 사방에서 날아든 화살세례에 고슴도치가 돼 46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일설에는 아테네도 암살자를 보냈다고 한다.

 

유력 정치인 지인의 아들, 명문대 졸업 등 엘리트코스를 밟다가 20대의 어린 나이에 정계에 입문해 승승장구했던 정계인사 A씨가 근래 논란이다. 그는 숙부나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에게 ‘숙제를 내 줄 테니 풀어 와라’고 요구하거나 ‘그의 말대로 하면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등 안하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급기야 소속 정당을 향해 “가처분신청 인용되면 망한다”고 경고하는 등 금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A씨는 라이벌 정당에서 더 큰 지지율을 기록 중이라고 한다.

 

성상납 증거인멸 교사 등 의혹을 받는 A씨는 소속 정당으로부터 ‘제명’이 유력시된다고 한다. 정말이라면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나는 셈이다. 고려 충렬왕 시기인 1305년 예문관대제학 추적이 저술한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존중해라(약요인중아무과아중인‧若要人重我無過我重人)”는 말이 나온다. A씨가 늦으나마 곱씹어봐야 할 선조의 준엄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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