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가 현실로…“죄다 경력만 찾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 쌓나”
개그가 현실로…“죄다 경력만 찾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 쌓나”

“아니 XX 무슨 다 경력직만 뽑으면 나 같은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

 

수년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개그 소재로 쓰였던 대사가 더욱 피부로 와 닿는 요즘이다. 당시에도 경력직 채용 위주의 고용시장의 현실을 풍자한 이 대사는 시청자들로부터 ‘사이다(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한 상황이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고 통쾌하게 진행되었을 때 쓰이는 용어)’라는 찬사를 받았다. 지금은 그 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이직 열풍까지 더해지면서 경력직 선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피해는 신입 구직자의 몫이다.

 

직장인 이직 열풍에 경력직 위주로 재편된 고용시장, 2~3년차 신입 나이 경력직 선호 뚜렷

 

구인·구직 플랫폼 잡코리아에 따르면 전체 직장인 중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는 직장인 비중은 무려 81.3%에 달했다. 무려 10명 중 8명이 이직할 생각을 갖고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무색해짐과 동시에 이직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던 인식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방증이다. 오히려 최근엔 ‘이직을 안 하면 손해’라는 인식까지 퍼지고 있다. 이직 포기 경험이 있는 직장인들조차 절반 이상(57%)은 ‘후회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직이 활발해지면서 고용시장의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었다. 정기적으로 신입 직원을 공개 채용하는 대신 수시로 경력직을 채용하는 기업이 부쩍 늘었다. 채용플랫폼 캐치에 따르면 올해 9~10월 게재된 채용공고(1만2821건)를 분석한 결과 경력직 9576건, 신입 3245건 등이었다. 경력직 채용공고가 신입에 비해 3배 가까이 많은 것이다. 경력직 선호 현상도 갈수록 심화됐다. 전년 동기 대비 채용공고 증가율은 경력직 38%, 신입 6% 등이었다.

  

▲ [그래픽=김문우] ⓒ르데스크

 

기업들도 교육이나 적응 기간 없이 곧장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직 채용이 효율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직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어쩔 수 없이 신입을 채용했던 과거와 달리 ‘열풍’에 가까운 이직 선호 현상 덕분에 가능한 선택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고용시장 상황 자체가 비용이나 시간 부담을 감수하고 신입을 뽑지 않아도 되게끔 바뀐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신입 자리를 경력직으로 채우려는 시도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직 서열이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곧장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신입급 경력직’ 선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존에는 신입 사원이 채웠던 막내 자리를 2~3년차 경력직으로 채운다는 의미다. 이러한 현상은 주요 기업의 경력직 선호 연차 조사 결과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에 따르면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경력직 연차는 3~5년차로 비중은 27%를 기록했다. 이어 △6~8년차(23%) △9~12년차(17%) △1~2년차(14%) △신입(8%) △13~16년차(7%) 등의 순이었다. 신입과 비슷한 연령의 1~2년차에 대한 이직 제안을 시도했던 사례도 전체 이직 제안 사례의 무려 22%나 차지했다. 신입급 경력 채용에 있어 성별 선호도는 여성이 남성 보다 높았다.

 

신입급 경력직 선호 현상에 속 타는 진짜 신입들…경쟁률 높아지고 준비기간 늘어나

 

신입급 경력직 선호 현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진짜 신입들이다. 대다수 기업이 채용 방식을 신입 채용을 줄이고 경력직 채용을 늘리는 식으로 바꾸면서 대졸 신입 구직자의 취업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2023년 하반기 대졸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 중 48%는 올해 하반기 신규 채용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채용 계획이 없다고 답한 기업도 16.6%나 됐다.

 

경기 불확실성 확대, 긴축경영 돌입 등으로 채용 여력이 감소한 이유가 가장 컸지만 정기 공채를 없애고 수시 채용으로 전환한 채용방식의 변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현재 국내 4대 그룹 중 신입사원 공채를 실시하는 기업은 삼성이 유일하다. 현대차·SK·LG 등은 꾸준히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있긴 하지만 삼성처럼 공채 개념이 아닌 필요할 때 수시로 뽑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대졸 신입의 취업 경쟁률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작년 대졸 신규채용 경쟁률인 평균 77대 1이었던데 반해 올해 대졸 신규채용 예상 경쟁률은 평균 81대 1로 조사됐다. 대학 졸업생의 첫 취업 소요기간도 2020년 7.2개월에서 2021년 7.7개월, 2022년 7.8개월, 2023년 8.2개월 등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높은 경쟁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청년들 중 상당수는 쉬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 기획재정부, 통계청 등에 따르면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쉬었음’ 청년(15~29세)의 규모는 2016년 26만9000명 수준이었지만 올해는 크게 늘어 1~9월 월 평균 41만4000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만3000명이 증가한 수준이다. 청년들의 ‘쉬었음’ 사유로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움’이 32.5%로 가장 많았다.

 

올해로 2년째 취업을 준비 중이라는 홍유빈 씨(25·여·가명)는 “요즘 보면 공채 대신 경력직 수시 채용이 많은데 대부분 2~3년차 경력을 뽑는다”며 “그런 공고를 보면 신입 입장에선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이어 “신입을 안 뽑다 보니 대졸 신입 경쟁률도 높아져 취직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며 “그래도 주변의 기대치도 있고 해서 눈을 낮추기가 어렵다보니 취업 준비를 핑계 삼아 그냥 쉬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김준수 씨(26·남)는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한창 이력서를 넣고 있는데 경쟁률이 상당히 높다”며 “신입 채용이 워낙 드물다 보니 고스펙자들도 많이 몰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 스펙으로 과연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취업이 늦어지면 최악의 경우엔 규모가 작은 기업에 입사해서 2~3년 간 경력을 쌓고 이직할 생각도 하고 있다”며 “그 방법이 계속 신입 공채에 도전 하는 것 보다 더 확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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