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현실에 대한 오해가 일자리와 구직자의 인식 불균형, 이른바 ‘일자리 미스매치’ 현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청년세대는 대기업에 입사해야 경제적 자유와 삶의 여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정작 대기업 직장인들은 돈과 시간은 비례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워라벨 문화에 발맞춘 몇몇 대기업의 특수 사례가 마치 전체 이야기인양 알려지면서 생겨난 오해가 대기업 쏠림을 심화시켰고 급기야 ‘청년백수 70만 시대’라는 암울한 결과로 이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갈수록 까다로워지는 청년들…“가기 싫은 회사 입사하느니 그냥 놀래요”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일부러 일하지 않는 청년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서 놀 수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항변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비임금근로 및 비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가 없음에도 ‘쉬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232만2000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67만6000명은 20~30대였다. 비율로는 무려 30%에 육박한다.
‘왜 쉬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15~29세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32.5%)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다음 일 준비를 위해 쉬고 있음 23.9% △몸이 좋지 않아서 18.2% △일자리가 없어서 7.3% 등의 순이엇었다. 30대의 경우도 ‘몸이 좋지 않아서’(30%)와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29.9%) 등이 주된 이유였다. 20~30대 전체로 놓고 보면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서 그냥 쉬는 이들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셈이다.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소기업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직종별 사업체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적극적 구인 활동에도 채용을 못 한 미충원 인원은 18만5000명으로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미충원 인원은 대부분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93.7%)에서 발생했다.
그럼에도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서 그냥 쉬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일자리 미스매치가 그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방증한다. 한 쪽에선 구직난을, 다른 쪽에선 구인난을 호소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 5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청년 구직자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년세대 직장 선호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선호 직장(복수응답) 형태는 대기업(64.3%), 공공부문(44.0%), 중견기업(36.0%), 중소기업(15.7%) 등의 순이었다.
“경제적 자유, 삶의 여유는 공존 불가…대기업 입사 후 느낀 것은 세상에 공짜 없다”
청년세대의 대기업 쏠림 이유는 대기업에 가야 경제적 자유와 삶의 여유를 함께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대기업 일자리를 선호하는 이유로 높은 임금과 복리후생(71.7%)을 가장 많이 꼽았다. 반대로 중소기업 일자리에 대해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업무량 대비 낮은 처우(63.3%),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실현 어려움(45.3%), 불투명한 미래성장(43.7%), 낮은 고용안정성 우려(39.3%), 사회적으로 낮은 인식(37.0%) 등이었다.
문제는 청년들이 가진 인식이 현실과 다소 동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이 임금과 복리후생 측면에서 중소기업에 비해 우수한 것은 맞지만 그 이상의 고충도 뒤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초기 사람인이 300인 이상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5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근무시간 외에 업무 처리를 고민하거나 압박감에 시달리는 응답자가 무려 70.4%에 달했다.
업무압박감에 시달리는 이유로는 ‘해야 할 일이 많아서’가 44.4%(복수응답)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업무 실수에 대한 불안감으로 재차 확인을 해서 30.7% △일을 다 못 끝내고 밀릴 때가 많아서 29.5% △성과 달성에 대한 부담이 커서 27.1% △근무시간 외에도 상시로 업무 요청을 받아서 26.6% 등의 순이었다. 근무시간 외에 업무연락을 받은 경험이 있는 직장인도 76%에 달했고, 응답자의 49.8%는 근무시간 후의 업무연락으로 인해 회사로 다시 복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어렵게 입사했다가 제 발로 이들도 늘고 있다. 4대 금융그룹(KB·신한·하나·우리)이 발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각 사의 30세 미만·사원급의 자발적 이직률 평균은 3.9%였다. 지난 2020년(1.4%)보다 2.8배 증가했다. 연령을 분류하지 않은 우리금융의 자발적 퇴직인원을 제외한 3대 금융그룹의 30세 미만·사원급 자발적 이직률 평균은 3.8%로, 2020년 평균이 0.6%를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2년 새 6배 가량 늘었다. 4대 금융그룹은 높은 급여와 우수한 처우 덕에 입사 경쟁률이 국내 ‘톱’ 급이다.
한 시중은행 3년차 직원은 “대학 시절부터 대기업이나 은행에 취직하려고 엄청 노력했고 졸업유예까지 해가며 어렵게 은행에 입사했다”며 “그런데 입사 후부터 줄곧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은행이 다른 업종에 비해 처우가 좋고 복지제도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그만큼 업무 강도가 높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며 “같이 입사한 동기들 중엔 결국 못 버티고 중견기업이나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에 본사를 둔 대기업 본사에 재직 중인 임희정 씨(29·여·가명)는 “올해로 입사한 지 3년 차인데 회사 생활을 시작한 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며 “대기업에만 가면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과 삶의 여유를 전부 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입사해보니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생들이나 취준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저녁이 있는 삶은 경제적으로 빠듯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은 저녁을 포기해야 한다”며 “내가 한만큼 대우받는 게 사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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