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산업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과도한 개입이 가계부채 문제를 확대시키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확히는 국민 환심을 사기 위해 시중은행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 이른바 ‘금융 포퓰리즘’이 가계부채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다. 금융 포퓰리즘으로 인한 빚에 대한 경각심 하락과 상대적 박탈감 유발, 이에 따른 가계부채가 증가의 악순환의 고리가 생겨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민 5명 중 2명은 채무자, 눈덩이 가계부채 문제에 IMF도 “우려 수준”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현재 국내 가계대출 잔액은 1845조7000억원에 이른다. 5년 전인 2018년 2분기 말(1520조6000억원)에 비해 무려 320조원 가량 늘었다. 차주(대출자) 수도 2018년 2분기 1893만명에서 올해 2분기 1978만명으로 100만명 가까이 증가했다. 국민 5명 중 2명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빚의 규모가 소득에 비해 과도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1년 말에 76.5% 수준이었으나 2021년에는 103.6%로 급증했다. 선진국 평균인 75%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심지어 2022년엔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8.1%로 또 다시 껑충 뛰며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우리나라의 과도한 가계부채 문제는 전 세계의 우려를 살 정도로 심각하다. 국제통화기금 대표단장은 지난달 열린 2023년 한국–국제통화기금 연례협의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큰 나라 가운데 하나다”며 “부채 증가율을 둔화시키는 데 정책적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리 정부도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앞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과도한 가계부채는 잠재성장률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가계부채 비율을 (GDP 대비) 100% 이하로 낮추는 것을 정책 1순위로 두겠다”고 밝혔다.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도 “과거 정부에서 유행한 ‘영끌 대출’이나 ‘영끌 투자’ 이런 행태는 정말로 위험하다”며 “가계 부채 위기가 발생하면 과거 IMF외환위기의 몇십배 위력이 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정부·정치권 은행 예대마진 비판➞시중은행 대출금리 인하➞대출수요 증가 ‘악순환’
여론 안팎에선 정작 정부와 정치권의 행보는 이러한 문제의식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가계부채 증가를 부추긴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정권을 막론하고 국민적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은행 경영에 압박을 가하는 행위가 잦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이 가계부채 증가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금융권 등에 따르면 시중은행에 대한 정부·정치권의 대표적인 압박 행위로는 은행의 가장 기본적인 사업형태인 예대마진 사업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꼽힌다. 금융업 자체가 규제 산업인 탓에 권력의 눈치를 봐야하는 은행 입장에선 대출이자를 낮춰서라도 예대마진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은행 입장에선 권력 눈치를 보느라 이익을 포기하는 셈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국민 환심을 사기 위한 이러한 행태가 오히려 가계부채 증가 효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난해 말 은행 임원들의 성과급 이슈가 한창 불거졌을 당시 은행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자 정부와 정치권도 즉각 호응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은행은 국방보다 중요한 공공재적 시스템이다”며 은행의 공공성을 강조했고 금융위원회는 “은행 돈 잔치로 인해 국민들의 위화감이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시중은행들은 곧장 가계대출에 대한 이자율 조정에 나섰다. 그 결과 올해 1월 5.47%였던 예금은행 평균 대출금리는 꾸준히 하락해 8월에는 4.83%까지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같은 기간 시중은행 가계대출 잔액은 꾸준히 늘었다. 4대 시중은행 가계대출 잔액만 보더라도 지난해 말 616조737억원에서 8월 말 680조8120억원으로 65조원 가까이 늘었다. 정부와 정치권의 금리 압박이 오히려 가계대출을 늘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금융권 안팎에선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꾸준히 되풀이될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시중은행에 대한 국민 호응을 의식한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이자하락에 따른 가계대출 수요 증가가 예상된다는 반응이다. 이미 불씨도 당겨졌다. ‘수도권 위기론’에 휩싸인 정부·여당은 ‘민생’을 명분 삼아 시중은행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 과도한 은행 이자로 서민들의 삶이 고단해졌다며 금리인하를 압박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30일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참모진이 최근 민생 현장을 찾아 청취한 내용을 소개하며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은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에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언급했다. 해당 발언은 은행 대출 금리 인하 요구를 애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돼 큰 파장을 낳았다.
여당도 시중은행 공격에 고삐를 죄고 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서민 자금줄이 메말라가는 상황에서 막대한 예대 차익을 벌어들이는 금융권 모습이 국민들에게 박탈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정부에서 내년 예산에 서민경제 회복을 위한 예산을 5조원 이상 편성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특별한 추가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치권 등에서 은행의 예대마진 수익구조를 문제 삼아 압박하면 은행 입장에선 대출금리를 조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식으로 대출금리 조정이 이뤄지면 일반 국민 입장에선 은행대출에 대한 경각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기존에 대출이 없던 사람도 ‘빚 안내면 바보’라는 식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영끌 투자 등에 눈을 돌릴 가능성도 높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가계대출을 줄이는 확실한 방법은 빚을 내는 행위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빚을 내면 손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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