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동안 근무했는데 아들이 집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재취업했어요. 현실적으로 아무리 좋은 직장에 다녀도 부모 도움 없인 결혼이나 출산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세상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게 미안하네요.”
은퇴 후 다시 일터에 복귀하는 중·장년층이 늘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연금을 받으며 노후를 즐길법한 나이임에도 젊은 시절 못지않은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들이 다시 일을 하는 이유는 젊었을 때와는 똑같다. 가족을 위해서다. 치솟는 물가와 집값에 부모 도움 없인 결혼이나 출산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현실에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다시 일터로 나서고 있다. 30년 가까이 일에 매진한 이들이지만 재취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고령의 몸 이끌고 재취업 나서는 은퇴세대들…“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직장인 최영규(62·남)씨는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30년 넘게 근무하고 지난해 퇴직을 했지만 다른 회사의 고문급으로 재취업했다”며 “현재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있고 두 자식 모두 서울에 있는 중견기업에서 일을 하며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지만 도저히 서울에 집을 살 엄두를 못 내고 있어 끝까지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퇴직 전에는 8000만원 정도의 연봉을 받았었는데 이번에 재취업 하며 4000만원 수준의 연봉을 받게 됐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땐 자존심 운운할 지 모르지만 오히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한다”며 “자녀들도 본인들이 살 집을 사기위해 열심히 저축 하는 중이기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어렵게 재취업을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최 씨는 “솔직히 몸이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이제는 정말 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며 “하지만 요즘 시대는 부모 도움 없이 자녀 스스로 집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결혼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편할 수 있다면 죽을때까지 일해도 상관없다”고 부연했다.
직장인 박기호(63·남)씨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한 건설사에서 28년 정도 근무한 뒤 최근 아파트 경비원으로 재취업했다”며 “일반 회사 6군데에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지고 결국 사촌들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일자리를 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아파트 경비원도 경쟁률이 엄청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원자들도 대부분 대기업 임원 출신 등 소위 말하는 ‘한 가닥 했던 사람들’이 많다”며 “예전에 직장을 다닐 때 보다는 훨씬 적은 급여를 받지만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지 않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경비 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동안 아이들을 나름 부족함 없이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자식들이 근로소득만을 가지고 집을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에 그걸 못해준 것이 너무 미안하다”며 “첫째 아들은 나이가 40인데 미쳐가는 부동산 가격에 아직도 자가를 구하지 못해 여전히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어 너무 안타깝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요즘엔 좋은 아버지가 못 됐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한탄했다.
“월 300만원씩 5년 모아도 빌라 전세금도 부족…대기업 다녀도 월급으론 집 못 사요”
임금직무정보시스템의 맞춤형 임금정보에 따르면 올해 기준 연령대별 연봉 수준은 △20대 후반 평균연봉 3773만원, 상위 25% 4297만원 △30대 초반 평균연봉 4620만원, 상위 25% 5476만원 △30대 후반 평균연봉 5445만원, 상위 25% 6529만원 △40대 초반 평균연봉 5922만원, 상위 25% 7300만원 △40대 후반 평균연봉 6175만원, 상위 25% 7900만원 등이다.
30대 초반 상위 25%의 연봉을 수령하는 사람의 경우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과 세금을 제외한 실수령액은 월 40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월세와 생활비를 제외하고 한 달에 300만원을 저금한다고 가정할 때 1년에 3600만원, 5년에 1억8000만원이다. 물론 연봉이 상승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연봉 상승률은 10% 미만으로 산정된다. 한 해 평균 20~30% 가량 오른 부동산 가격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30대 후반과 40대 초반 상위 25% 기준 월 실수령액은 각각 450만원, 500만원으로 한 달에 400만원을 저금한다고 가정할 때 한 달 300만원을 저금하는 사람에 비해 1년 동안 1200만원을 더 저금할 수 있다. 1200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집을 사기에 유의미한 금액은 아니다. 물론 회사마다 성과금이나 추가 수당 지급 여부도 있겠지만 이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집을 사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결국 부모 도움 없이 월급만으로 집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국내 한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이유경(29·여) 씨는 “정말 치열한 취업준비 끝에 대기업에 입사해 한 달에 200만원씩 2년을 모았는데 5000만원이 채 되지 않아 매매는 꿈도 꿀 수 없고 대출을 받지 않고서는 빌라 전세도 가기 힘들다”며 “최근 1억5000만원 정도 대출을 받아 투룸 빌라에 들어갔는데 금리가 올라 한 달에 대출이자를 70만원 정도 내 저금액이 줄었고 대출이자가 늘어나니 저축할 수 있는 돈을 줄었다. 결국 내 집 마련은 점점 멀어지는 셈이다”고 말했다.
서울·경기·지방 모두 부동산 가격 급등…결혼 포기에 출산 기피까지 ‘망국의 도미노’
서울 부동산 시세는 부모세대와 청년세대 좌절의 이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서울 아파트 가구당 평균 매매가격은 12억9490만원이다. 5개 광역시는 4억4135만원, 기타 지방은 2억6557만원 등이다. 서울 아파트는 1987년부터 지난해까지 36년간 연평균 6.7% 오르며 장기적 우상향을 보였다. 이자 등을 제외한 단순 계산만으론 월 300만원씩 모아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꼬박 36년을 모아야 한다.
통계청의 주택 소유 현황 분석을 보면 가구주가 임금근로자인 가구의 주택 소유율 현황에서 서울은 47.9%로 17개 지자체 중 꼴찌다. 전국에서 임금근로자의 가구 주택 소유율이 50%를 하회하는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단지 수도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12월 기준 부산지역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2017년 2억9512만원에서 지난해 4억35만원으로 35.6% 증가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장 왕성한 사회활동을 통해 경제 활성화를 촉진시키고 결혼을 통해 사회를 유지하는 30대의 주택 소유 현황은 ‘심각’ 수준에 이르고 있다. 올해 대한민국 전체 인구 5000만명 중 주택 소유자는 1508만명으로 약 30.1%다. 주택 소유자 중 30대는 10.9%에 불과하다. 가정의 근간이 되는 주택을 소유할 수 없게 되자 결혼 적령기가 늦어지거나 아예 결혼을 포기함으로서 저출산까지 심화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마강래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청년이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여건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내 집 마련이 가장 큰 부담이다”며 “집값을 낮추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마 교수는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어느 순간 자식의 집 마련이 부모의 몫이 돼 퇴직을 앞둔 나이에도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며 “고령자의 근로활동이 늘어나게 되면 청년층의 일자리가 줄고 취업난과 함께 저출산이 심각해지는 등 악순환이 연속되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 안정화를 통해 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배근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부동산 가격 안정화를 위해 기존 다주택 소유자들의 매물이 시장으로 많이 나오게 해서 가격을 하향시켜야 한다”며 “지난 수십년간 공급정책 만으론 주택 가격을 잡은 적이 없다는 것을 모든 국민들이 경험으로 느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을 올리면서 공급하는 대책은 일반 서민들, 무주택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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