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비용으로 학원 등록했어요.”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학원가로 향하는 청년 직장인이 늘고 있다. 여름 휴가에 드는 돈과 시간을 아껴 자기개발에 열중하겠다는 것이다. 업무능력 향상부터 취미, 승진, 업종 전환에 이르기까지 학원을 선택한 이유는 달랐지만 고물가·경기침체로 인한 미래 불확실성이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청년 직장인들 사이에선 ‘호캉스’(호텔+바캉스)란 말 대신 ‘학캉스’(학원+바캉스)란 말까지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게임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 이광호(31) 씨는 회사에서 지급받은 여름 휴가비로 빅데이터와 AI 학원에 등록했다. 여름 휴가로 주어진 5일 동안 일반반과 주말반 학원 수업을 모두 들을 계획이다. 연차가 쌓여갈수록 회사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평소 업무역량을 늘리기가 쉽지 않아 휴가를 이용해 자기개발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이 씨는 “회사에 취업하면 더 이상 학원이나 시험과는 작별일 줄 알았는데 더 열심히 해야 하는 현실이다”며 “위에서 요구하는 실력은 높아져만 가고 또 아래 들어오는 신입들은 나보다 스펙이 좋기에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 배워야 하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왜 빅데이터와 AI를 선택했냐는 질문에는 “과장·부장급들이 한때 제2외국어나 컴퓨터 학원을 다닌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게 빅데이터와 AI다”며 “요즘 들어오는 신입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파이썬, R, 자바 등 코딩과 빅데이터 프로그램을 다루고 있어 이에 밀리지 않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AI는 최근 뜨고 있어 좀 더 앞서나가기 위해 도전했다”고 답했다.
“코딩, AI 모르면 밀려요”…생존 위해 학캉스 선택하는 직장인들
최근 코딩은 초등학교 시기부터 가르치고 있을 정도로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 과거 80년 후반에서 90년 초반에 태어난 세대가 학창시절부터 컴퓨터 수업을 한 것과 비슷하다. 최근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코딩 능력을 탑재하고 있다.
한 대기업 인사 관계자에 따르면 “90년대 초반생들 취업 시기에 제2외국어가 당연했던 것처럼 요즘 입사 지원자 대부분이 코딩과 빅데이터 능력을 갖추고 있다”며 “마케팅, 경영, 기획 부서에 상관없이 코딩과 빅데이터 이제는 필수적인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강남에 위치한 컴퓨터 학원 관계자는 “최근 코딩과 빅데이터 심지어 AI까지 배우로 오는 30대들이 증가하고 있다”며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업무에 필요해서라고 답한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20대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컴퓨터 언어(코딩)에 대해 이해도가 있는 반면 30대들은 종사자가 아닌 이상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컴퓨팅 언어에 비교적 익숙한 90년대 후반생들과 00년생들 취업이 시작되자 위기감을 느낀 30대 초반 직장인들이 여름 휴가철을 이용해 코딩과 빅데이터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나만의 필살기 만들고 싶어요”…단기이색 학원 인기
휴가를 이용해 이색 자격증에 도전하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빅데이터나 AI의 경우 배우는 기간도 길어 당장 여름휴가 기간 내에 끝내기는 불가능하다. 또 가시적 성과를 얻기까지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에 단기 자격증을 노린 학원들이 인기가 많다. 이색 자격증을 획득해 자신만의 특기로 이용하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강남에 있는 한 와인 학원은 바쁜 직장인들을 위한 원데이 소믈리에 코스 만들었다. 해당 코스는 국제 와인 자격증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Lv.1을 하루만에 교육부터 시험까지 모두 완성하는 코스다. WSET는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자격증으로 레벨 3까지 존재한다.
해당 학원 관계자는 “와인을 배우고 싶은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며 “단순 취미보다는 이직이나 업무적으로 사용을 위해 배우시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학원 측에 따르면 관광·요식 업계 종사자나 수입·수출 관계자들이 가장 많이 찾지만 영업, 마케팅, 사업팀에 소속된 평범한 직장인들도 많이 신청한다. 특히 영업팀의 경우 해외 바이어나 고객을 접대할 때 자신만의 필살기로 사용하기 위해 생각보다 많이 찾는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직장인들 또한 회식이나 워크샵 등 사내 행사에서 좋은 인상을 남겨주기 위해 자격증 도전에 나서기도 한다.
해당 교육 프로그램은 6시간에 시험까지 친다. 비용은 30만원대로 휴가비와 비슷한 수준이다. 자신만의 필살기를 만들고 싶은 직장인들이 휴가를 포기하고 선택하기에 금액적인 부분도 적당하고 시간 또한 부담이 없다는 게 학원 측 설명이다.
와인 자격증뿐만 아니라 국제마케팅자격증(AMA PCM), 구글 애널리틱스(GAIQ) 등 짧은 여름휴가를 이용해 초단기로 획득할 수 있는 자격증에 많은 직장인들이 휴가를 반납하고 도전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 노리고 있어요'…장기계획, 하반기 시작되는 7월 적기
이직이나 업종을 변경하기 위한 직장인은 장기적 계획을 시작하고 있다. 하반기가 시작되는 여름휴가 시즌부터 준비를 시작해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움직이는 것이다.
회사원 김혜림(29·여) 씨는 올해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부터 게임 기획 학원에 등록했다. 기존 다니던 회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직종이다. 김 씨는 3달 정도 뒤에 열리는 하반기 공채에 도전하고 최종적으로는 내년 상반기에는 꿈꾸던 업종에 들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김 씨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에 7월이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반기 공채에 도전할 수도 있고 떨어진다 해도 상반기도 노릴 수 있다는 것이 A씨의 설명이다.
김 씨는 “학자금 대출이나 생활비 등이 급박한 상황에서 일단 취업을 한 것이라 회사를 다니면서도 본래 꿈꾸던 게임업계로 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며 “그렇게 2년이나 흘러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지금부터 내년을 노리고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씨에 따르면 학원들의 취업관련 프로그램이 대부분 6개월 코스로 이뤄져 있기에 7월에 가장 활발하다고 전했다. 그래서 학원을 다녀보니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이직 준비 직장인들도 많았다고 밝혔다.
취업 플랫폼 잡코리아가 최근 남녀 직장인 653명을 대상으로 ‘여름휴가 계획’을 조사한 결과, 46.6%가 “이직을 준비하겠다”고 답했다. 잡코리아에서 조사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서는 직장인 579명 중 절반에 가까운 48.7%가 하반기에 이직 준비를 시작한다고 답했다. 사실상 이직이나 업계 변경을 희망하는 직장인 대다수가 하반기 여름휴가 기간부터 준비단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어지는 경기 불황에 취업에 성공한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고용 불안감이 돌고 있어 학원을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자기 발전과 생존을 위해 휴가를 반납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좋지만 일각에서는 현대인 스트레스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초등학교부터 경쟁으로 겪는 불안감이 직장인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용지속성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젊은 직장인들은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어렵다”며 “이들의 숨통을 트일 수 있는 문화적 활동이나 각종 서비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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