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쇄국정책 뚫은 한류(韓流)…1호 팬은 ‘로열패밀리’였다
北 쇄국정책 뚫은 한류(韓流)…1호 팬은 ‘로열패밀리’였다


▲ 20일 북한 조선중앙TV 공개 영상에서 18~19일 전술핵운용부대들의 ‘핵반격 가상 종합전술 훈련’을 참관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가운데)과 딸 김주애(김정은 왼쪽). [사진=뉴시스]

 

“자기야” “오빠” 대한민국 여느 남녀커플‧신혼부부의 대화 내용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한국과 나란히 위치해 있음에도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단절된 가깝고도 먼 그곳, 바로 북한이다.

 

외래어를 강력 배척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평양문화어보호법(이하 보호법)’까지 시행 중인 북한에서 한국 문화가 대거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화의 힘은 ‘핵의 장막’ 북한마저도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심지어 ‘위대한 인민의 영도자’를 자처했던 김정일과 로열패밀리마저 공공연히 한국 문화를 청취했고 지금도 청취한다는 전언이다. 르데스크는 그 누구보다 자본주의 문화에 열광하면서도 주민들에게는 접촉 금지를 강요하는 로열패밀리의 이중적 모습, 종래에는 ‘급변사태’까지 야기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북한 내 한류(韓流) 확산 현황 등을 정리해봤다.


▲ 지난해 12월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일대에서 북한 주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자기야” 가르치면 사형에 처한다는 北

 

“평양문화어보호법은 우리 언어생활 영역에서 비규범적인 언어요소들을 배격하고 평양문화어를 보호하며 적극 살려나갈 데 대한 조선노동당의 구성과 의도를 철저히 실현하고... (중략) 우리의 사상과 제도‧문화를 굳건히 수호하기 위한 강력한 법적담보를 마련하는 데 실천적 의의가 있다”

 

지난 1월19일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발표된 보호법 내용이다. 해당 법은 동월 17~2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14기 8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전격 채택됐다. 법안의 구체적 조항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북한 표준어 격인 평양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강한 처벌을 내린다는 내용일 것으로 추측됐다.

 

법안 내용은 근래에야 비로소 파악됐다. 지난 15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말을 사용하면 6년 이상 징역, 한국 말투를 가르치면 최고 사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7월 국회 정보위원회가 공개한 국가정보원 보고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한국말이 일상처럼 쓰이고 있다. 아내를 ‘여보’ 대신 ‘오빠’라고 부르는가 하면 남자친구는 ‘남동무’ 대신 ‘남친’으로 호칭하고 있다. ‘창피하다’는 표현이 ‘쪽팔린다’가 된 지는 오래다. 2016년 탈북한 나민희 씨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원래 “너 어떻게 할래, 했니, 핸?”이라고 묻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 어떻게 할 거야?”로 바뀌었다.

 

보호법은 휴대전화‧컴퓨터 등 각종 전자기기에 대한 ‘괴뢰말 제거프로그램’ 설치도 의무화했다. 이러한 규제로 인해 현재 한반도 북쪽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북한 말투를 배우는 웃지 못 할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RFA는 평안북도 소식통을 인용해 “오랜 세월 꽉 막힌 체제에서 ‘장군님 만세’만 외치던 주민들이 한국 영화‧드라마를 통해 자유롭고 매력적인 한국식 생활문화‧말투에 매력을 느껴 따라하게 된 것”이라며 “이미 한국식 말투에 익숙해진 주민들은 평양말을 따로 연습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유로는 “한국말 사용 단속이 강화되자 얼결에 한국말이 튀어나올까봐 조선(북한)식 말투를 연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5년 유동석 당시 부산대 국어교육학과 교수의 논문 ‘북한의 언어생활’ 등에 따르면 채소는 남새, 달걀은 닭알, 가깝다는 가찹다, 대야는 소래, 가발은 덧머리, 가시광선은 보임광선, 드라이아이스는 마른얼음, 수면제는 잠약, 좌익수는 왼쪽지기라고 불러야 한다.


▲ 제19회 추억의 광주충장 월드페스티벌이 열린 지난해 12월 광주 동구 충장로에서 거리 퍼레이드 경연이 펼쳐지고 있다.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장인물로 분장한 퍼레이드 참가자가 시민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주민들, ‘오징어게임’ 보며 처지 비관

 

한국 드라마‧영화 등은 주로 중국을 거쳐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북한에 유입되고 있다. 대표적 수단이 ‘스텔스 USB’다.

 

탈북민단체인 NK지식인연대가 모 항구➞산둥반도➞북중 국경 등 루트를 통해 북한에 반입시켰던 스텔스 USB는 영화 등은 물론 로열패밀리의 위선을 고발하는 영상도 담았다. 곧바로 컴퓨터에 연결하면 파일이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특정 조작을 가하면 비로소 파일이 검색된다.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북한 명문인 김책공대 교수 출신이다.

 

스텔스 USB의 위력은 강력했다. 2019년 9월 무렵 함경북도 세관은 돌연 USB 등 휴대용 저장장치 검열을 강화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동년 7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외부정보 유입‧확산 및 이로 인한 체포사건 여파로 분석됐다.

 

당시 청진에서는 일반 주민뿐만 아니라 보안원(경찰)‧보위원(비밀경찰)까지도 대거 검거돼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현지 소식통은 북한 전문 매체 데일리NK에 “7월 말 청진에 사는 한 보안원이 음란물 USB를 갖고 있으면서 가까운 사람들과 돌려 보다 발각됐다”며 “이 USB는 보안원뿐만 아니라 보위원들도 많이 본 것으로 확인돼 대대적 검열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 USB는 스텔스 USB인 것으로 추정됐다. 소식통은 “USB 안에 든 내용이 처음에는 나오지 않았다”며 “전자제품에 능한 주민들이 데이터를 복구해 USB‧CD에 옮겨서 돌리기 시작하면서 대대적으로 퍼지다가 일이 터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위원 등의 한국 문화 애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에도 이미 북한에서는 보위원과 관련된 우스갯소리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버스에 탄 남녀학생이 “이게 뭐니?” 등 한국 말투로 대화하는 걸 보고서 격분한 보위원이 “너희들 그러면 되니?”라고 저도 모르게 서울 표준어로 따졌다는 내용이다.

 

북한 주민들이 즐겨 본 영상 중에는 넷플릭스 ‘오징어게임’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21년 11월 RFA는 중국에서 불법복제 된 오징어게임 영상이 USB에 담겨 북한에 밀반입됐다고 보도했다.

 

북한 당국이 오징어게임을 두고 “자본주의 사회 실상을 드러냈다. 극한경쟁으로 인류가 전멸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겁함을 보여준다”고 비난했지만 소용없었다. 오징어게임은 주로 평양의 부유층, 청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특히 부유층들은 외화벌이를 강요당한 뒤 실적이 좋지 않으면 숙청당하는 자신들 처지가 드라마 줄거리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2008년 9월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열린 자유선진당 정책간담회에 참석해 북한 정세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주체사상을 만든 황 전 비서는 김일성 시대 당시 김일성‧김정일에 이어 사실상의 정권 서열 3위였을 정도로 북한 내부에 정통했다. [사진=뉴시스]

 

‘급변사태’로 이어질 수 있는 로열패밀리 ‘내로남불’

 

지난해 11월 데일리NK 등이 공개한 ‘북한 주민의 외부정보 이용과 미디어환경에 대한 실태조사’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 거주 중인 주민 50명 중 49명(98%)이 “한국을 포함한 외국 콘텐츠를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28%는 “매주 한 번 이상 본다”고, 46%는 “매달 한 번 이상 본다”고 밝혔다. 79.2%는 “(해외 영상콘텐츠를 본 후) 한국 사회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56.3%는 “한국식 화법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북한 내 한류의 원조는 다름 아닌 ‘로열패밀리’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정일이 배우 이영애의 ‘광팬’이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나섰던 김정일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4t의 송이버섯을 선물했다. 그해 10월4일 노 대통령이 귀환을 위해 북한 측 출입사무소(CIQ)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 중이던 박재경 인민무력부(국방부) 부부장은 “김 위원장이 드리는 선물을 갖고 왔다”며 함경북도 칠보산에서 난 송이버섯 500상자를 건넸다.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경남 통영 나전칠기로 만든 12장상도 8폭 병풍, 무궁화 문양의 다기 및 접시, 전남 보성녹차, 영화‧드라마‧다큐멘터리 DVD 등을 선물하며 화답했다. DVD 세트에는 이영애가 직접 사인한 드라마 ‘대장금’도 포함됐다.

 

르데스크 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일은 이영애를 두고 “굉장히 우아하다. 우리 영화 예술인들도 그의 연기를 보고 배워야 한다”며 대장금을 비공개로 시청할 것을 지시했다. 김정일은 심지어 “미국의 ‘람보’를 보지 않았다면 영화를 봤다는 말을 하지도 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가장 앞장서서 한국 문화에 열광하면서도 정작 주민들에게는 금지를 강요하는 ‘내로남불’ 행태는 현재진행형이다. 르데스크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 당‧정‧군 고위간부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로열패밀리 자택에는 디지털위성TV 등이 설치돼 실시간으로 한국 방송을 볼 수 있다.

 

외래문화를 배격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무색하게 지난 16일 김 위원장의 딸 김주애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발사 참관에서 입었던 외투는 프랑스제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로 확인됐다. 해당 제품은 현재 2800달러(약 358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RFA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내 자식은 깡말랐는데 김주애는 달덩이”라며 격분하는 상황이다. 평안북도 소식통은 “지금 주민들은 제대로 못 먹어 얼굴에 광대뼈만 남았다”며 “그런데 (김주애가) 잘 먹고 잘 사는 귀족 얼굴에다 화려한 옷차람이 TV로 자주 방영되니 밸(화)이 나서 참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로열패밀리의 ‘내로남불’로 인한 북한 내 한류 확산은 종래에는 ‘급변사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북한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내부로부터의 사상적 패배”라고 누차 밝힌 바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 정권도 언어의 힘을 알기에 한국 말투를 민감하게 통제하는 것”이라며 “법 제정 등은 내부적으로 ‘사상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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