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국민 인내심 시험하는 이재명의 물귀신작전
[데스크칼럼]국민 인내심 시험하는 이재명의 물귀신작전
▲ 오주한 정치부장

‘파리코뮌(Paris Commune)’은 1871년 3~5월 프롤레타리아(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세웠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로 일컬어진다. 역사의 뿌리를 더듬으면 18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리코뮌은 노동계급 인권신장 등을 주장하며 군중을 선동했다. 그러나 실상은 부패‧타락‧무능과 내로남불, 그리고 ‘물귀신작전’이 이면에 난무했던 실패한 혁명운동이었다.

 

1789년 7월14일 군중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서막으로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했다. 1792년 여러 정파(政派)가 모여 제1공화정 수립을 선언하고 국민공회를 출범시키자 결국 루이16세는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입헌군주제 도입을 주장한 지롱드당(Girondins‧온건공화파)를 제압하고 루이16세 처형을 주도한 건 급진공화파인 자코뱅(Jacobins)이었다. 혁명기에 쁘띠 부르주아( petite bourgeoisie‧중산층) 및 서민층에 지지기반을 뒀던 자코뱅은 약 100년 뒤 출범하는 파리코뮌의 한 축이 된다. 자코뱅은 국왕 처형 명분은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은 유죄가 된다”였다. 이들은 나아가 지롱드당마저 국민공회에서 추방하는 등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다.

 

조르주 자크 당통(1759~1794)은 자코뱅이 주도세력이었던 몽테뉴당(Montagne‧산악당)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당초 법학을 전공하고서 파리고등법원 서기를 거쳐 왕실고문회 소속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대혁명이 벌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코뱅에 가입해 혁명운동을 주도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당시 군중을 선동한 것도 당통이었다.

 

당통은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계급을 엄벌해야 한다며 능구렁이 같은 언변을 구사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여느 자본계급 못지않은 사치‧향락을 누리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혁명기의 혼란 속에 가치가 바닥을 친 국유재산들을 헐값에 사들이는가 하면 파리 인근에 세 채의 호화주택‧별장을 매입했다고 한다. 법무장관 시절에는 20만 리브르의 공금유용 정황까지 드러났다고 한다.

 

자코뱅은 그런 당통의 부정부패를 애써 모른 척했지만 제 부귀영화를 위해 혁명을 이용하는 듯한 내로남불 행태를 바라보는 여론은 자연히 급랭했다. 식재료 가격규제 등이 골자였던 로베스피에르의 가격상한제법 실패와 같은 자코뱅의 무능도 지지율 타격에 한 몫 했다. 식재료 가격은 폭등했으며 백성들은 혁명 10년 후에도 여전히 굶주렸다. 급진파 혁명가였던 생쥐스트의 “빵은 인민의 권리” 주장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권력도, 돈도 모두 내려놓기 싫었던 당통은 궁지에 몰리자 ‘물귀신작전’에 나섰다. 인류역사상의 학살극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학살극으로 꼽히는 ‘9월 학살’이 그것이다. 당통은 “나를 처벌해야 한다면 저 부르주아들의 숨통부터 먼저 끊어놔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1792년 8월 자코뱅의 압력을 받은 입법의회는 프랑스 전역의 반혁명 용의자 체포를 허가하는 한편 재판을 위한 특별형사재판소 설치를 승인했다. 동년 9월 당통은 연설에서 “적을 이기기 위해선 대담하고, 더욱 대담하며, 항상 대담해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결국 9월2일 감옥에 만원을 이루는 모든 용의자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격문이 발표되자 습격이 시작됐다. 삼색(三色) 완장을 찬 의용군들은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지 않거나 심지어 ‘결백이 입증’된 반혁명 용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끌고 나와 ‘답정너(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된다)’ 식의 약식재판에 회부했다.

 

인민재판에서 속전속결로 유죄가 확정된 용의자들은 즉각 군중에 의해 맞아죽거나 단두대 위에 서야 했다. 형식적인 재판마저 생략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혁명선서를 거부한 성직자 170여명은 감옥에 들이닥친 성난 폭도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인권유린도 횡행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수발들었던 랑발르 공작부인은 폭도들에게 목숨을 잃은 뒤 옷이 벗겨지고 사지가 유린됐다. 머리는 참수된 후 창 끝에 걸려 전시됐다.

 

일각에서는 9월 학살과 당통은 관련 없다고 주장하지만 신뢰성은 낮다. 일단 학살을 선동한 사람부터가 당통이었다. 당통이 즉결처분 대상자를 모아 작성한 ‘살생부(殺生簿)’도 후대에 발견됐다고 한다. 혁명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롤랑 부인에 의하면 당통은 “나는 용의자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귀신작전으로 여론 시선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고 자신은 살아남는 듯 싶었던 당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1794년 그는 여론의 성토 끝에 뇌물수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뒤 괘씸죄까지 적용돼 극형을 선고받았다. 당통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옛 동료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다음은 네 차례”라며 물귀신작전을 시도했다고 한다.

 

정치권 내 범죄 혐의자들의 물귀신작전이 활개치고 있다.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으로 구속‧불구속의 갈림길에 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홍준표 대구시장도 경남FC 후원 받았다는데 왜 나만 문제 삼느냐’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김성주 민주당 의원은 21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이 대표를 기소한다면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도 똑같은 혐의로 수사‧기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홍 시장을 둘러싸고 무차별 제기됐던 각종 의혹들은 이미 소명됐다는 게 중론이다. 문재인정부는 19대 대선에서 문 대통령과 맞붙었던 홍 시장의 경남FC 의혹을 낱낱이 살폈지만 혐의점을 전혀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홍 시장도 “내가 모금한 성금은 대가성이 전혀 없는 순수한 지원금이었기에 문재인조차도 나를 입건하지 못한 것”이라며 민주당 측 주장을 일축한 바 있다.

 

‘물귀신작전’에 나선다고 해도 자신을 둘러싼 혐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도리어 당통의 사례에서 보듯 국민의 의심만 높여 종래에는 제 자신을 해치게 된다. 이 대표가 정말 무고하다면 법정에 가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면 된다. 십수가지 혐의에 대한 각종 증언‧증거들이 속출하는데도 검찰수사에 성실히 협조하는 대신 정치적 술수만 외치는 듯한 이 대표, 민주당을 두고서도 당통의 사례처럼 국민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이 대표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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