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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업’ 딱지 붙이면 예타 패스?…혈세 수십조 깜깜이 투입 우려
‘국가사업’ 딱지 붙이면 예타 패스?…혈세 수십조 깜깜이 투입 우려

정부가 국가 전략산업 육성과 지역균형발전 등을 앞세워 대규모 국책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잇달아 면제하면서 재정 건전성을 둘러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업 추진 속도를 높일 필요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타 면제가 예외적 수단을 넘어 사실상 정책 추진의 지름길처럼 활용될 경우 경제성·재정 부담을 사전에 검증하는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올해 각 부처가 예타 면제를 요청한 사업 가운데 사업비가 공개된 주요 9개 사업만 13조440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국가 정책적 필요’를 이유로 면제된 사업비 13조7828억원에 이미 근접한 수준이다. 올해부터 AI·반도체 등 500억원 이상 대형 국가 R&D 사업도 예타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사업의 시급성이 비용 검증과 사업성 평가를 생략하는 만능 명분으로 활용돼선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13조 넘긴 예타 면제 요청…‘국가 정책 필요’ 앞세워 재정 안전장치 무력화 우려

  

예비타당성조사는 대규모 신규 재정사업에 본격적으로 예산을 투입하기 전 경제성과 정책성, 지역균형발전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제도다.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업이라도 예상 수요와 사업 규모, 비용 대비 효과 등을 한 번 더 따져 재정 낭비 가능성을 줄이는 일종의 사전 안전장치다. 그러나 최근 대형 국책사업을 중심으로 예타 면제가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각 정부부처가 예타 면제를 요청한 사업은 26개에 달했다. 이 중 사업비가 확인된 주요 9개 사업만 13조4400억원 규모다. 

 

▲ [그래픽=장혜정] ⓒ르데스크
▲ [그래픽=장혜정] ⓒ르데스크

 

가장 규모가 큰 사업은 산업통상부가 추진하는 ‘서남권 반도체클러스터 조성 통합재정지원’이다. 정부는 2027년부터 2030년까지 총 6조원을 투입해 생산기지 기반시설과 산업 생태계, 인력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와 연계해 농림축산식품부는 반도체 산업단지에 공급할 산업용수 확보 과정에서 부족해지는 농업용수를 보충하기 위한 730억원 규모 ‘신북지구 농업용수 공급’ 사업의 예타 면제를 요청했다.

 

지역 성장산업을 지원하는 ‘5극3특 성장엔진 특별보조금’에도 2027년부터 2030년까지 2조8000억원이 투입된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 관련 전력·용수 인프라도 예타 면제 대상이다. 공개된 내년도 예산만 약 1조9000억원으로 향후 전체 사업기간에 투입되는 재정을 감안하면 실제 총사업비는 이보다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예타가 면제되는 사례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 등에 따르면 예타 면제 총사업비는 2023년 11조9999억원에서 지난해 19조3938억원으로 급증했다. 이 가운데 ‘지역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이라는 사유에 따른 면제만 13조7828억원으로 전체의 71.1%를 차지했다.

 

예타 면제가 지역균형발전이나 경제·사회적 대응이라는 정책 목적을 폭넓게 포괄하는 만큼 행정부의 판단 여지가 크다는 점이 지속적으로 문제로 지적돼 왔다. 정책적 중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구체적이지 않을 경우 상당한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도 정부가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사전검증을 거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간 300억원 이상 신규 조세특례 가운데 최근 5년간 예비타당성평가 대상은 총 31건이었지만 실제 평가는 6건에 그쳤고 25건이 면제됐다. 면제율은 무려 80.6%다. 더욱이 면제된 25건은 모두 ‘경제·사회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하는 경우로서 국무회의 심의를 거친 사항’이라는 포괄적인 사유가 적용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처럼 범위가 넓은 개념으로 면제를 허용하면 실제 사전평가의 필요성이 높은 정책까지 검증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저출산 대응을 이유로 다자녀 승용차 개별소비세 감면, 결혼세액공제, 자녀세액공제 확대 등 신규 조세지출이 반복적으로 평가를 면제받기도 했다.

 

‘속도’ 필요해도 검증까지 생략해선 안 돼…면제사업 대체심사·사후평가 강화 시급

 

▲ [그래픽=장혜정] ⓒ르데스크
▲ [그래픽=장혜정] ⓒ르데스크

 

정부가 예타 면제를 확대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사업 추진 속도가 지목된다. 특히 AI와 반도체, 양자, 우주항공처럼 기술 변화가 빠른 분야에서는 예타 과정이 길어지는 사이 투자 적기를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 올해부터 국가 R&D 사업의 예타가 폐지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기존에는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 대형 국가 R&D 사업이 예타 대상이었지만 제도 개편 이후 별도의 사전점검 체계로 전환됐다. 다만 정부 역시 예타 폐지를 곧바로 ‘무심사’와 동일하게 운영하지는 않고 있다.

 

1000억원 이상 대규모 연구시설·장비 구축이나 연구단지 조성, 우주 분야 체계개발 사업 등 구축형 R&D의 경우 별도의 심사위원회와 전문검토단을 통해 사업 착수부터 단계별로 검증하도록 했다. 최근 국가 과학기술정보 AI·컴퓨팅 허브센터와 AI모빌리티 종합 실증 콤플렉스, 대용량 그린수소 생산 기술개발 및 실증, 첨단항공엔진 국산화, 레이더우주감시체계 등 5개 사업이 첫 심사 대상으로 선정됐다.

 

예타를 거치지 않은 사업은 착수 이후 문제가 발견될 경우 되돌리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토목·인프라 사업은 일단 부지를 확보하고 공사에 들어가면 이미 투입한 비용 때문에 사업을 중단하기 힘든 이른바 ‘매몰비용’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당초 수조원 규모였던 사업이 설계 변경이나 물가 상승, 추가 인프라 건설 등을 이유로 계속 불어날 경우 부담은 결국 미래 재정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 포괄적 표현만으로는 어떤 사업이 예타를 면제받고 어떤 사업은 검증을 받아야 하는지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예타 면제 사유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르데스크
▲ 포괄적 표현만으로는 어떤 사업이 예타를 면제받고 어떤 사업은 검증을 받아야 하는지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예타 면제 사유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르데스크

 

특히 국책사업의 경우 첫해 예산만 보면 부담이 크지 않아 보이더라도 전체 사업기간을 기준으로 보면 수조원대 재정이 투입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예타 면제 여부를 판단하는 단계부터 단년도 예산이 아니라 총사업비와 향후 운영비, 추가 재정소요까지 공개하는 방식으로 중장기 재정부담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면제 사유도 보다 구체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과 같은 포괄적 표현만으로는 어떤 사업이 예타를 면제받고 어떤 사업은 검증을 받아야 하는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긴급한 재난 대응이나 국가안보처럼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운 사업과 일반적인 산업육성·지역개발 사업을 같은 수준으로 취급할 경우 사실상 대부분의 대형 국책사업이 면제될 가능성이 높다.

 

예타를 면제하더라도 경제성 검증 자체를 없애기보다 사업 특성에 맞는 축약형 사전검토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외부 전문기관이 사업비와 수요, 대안 사업, 중장기 재정 부담을 최소한으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면 사업 추진 속도와 재정 통제를 일정 부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어서다.

 

사후평가 역시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예타 면제로 사전검증을 생략한 사업일수록 착수 이후 일정 단계마다 당초 사업비와 실제 투입액, 예상 수요와 실제 이용량, 사업 목표 달성 수준 등을 점검하고 차이가 크게 발생할 경우 사업 규모나 추진 방식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한석현 국회예산정책처 추계세제분석실장은 “국가 전략산업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신속한 재정 투입이 필요한 경우 예외를 인정할 수 있지만, 예외가 반복돼 사실상의 원칙으로 굳어지면 예타 제도의 의미 자체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며 “면제 요건을 명확히 하고, 사전 대체심사와 중간점검·사후평가를 함께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재설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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