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이퐁시가 ‘LG 씨티(CITY)’라는 이름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역 경제와 생활권 전반에 걸쳐 LG그룹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인 수준에 가깝기 때문이다. LG그룹 계열사들의 생산시설이 밀집한 짱주에(Tràng Duệ) 산업단지 주변에는 수십 곳의 협력·위성 기업이 모여 있으며 대규모 근로자 주거단지도 이달 말 최종 완공될 예정이다. 도심 반까오(Văn Cao) 거리 일대에는 한국 음식점을 비롯해 한국인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각종 상업시설이 대거 자리하고 있어 산업단지 밖에서도 LG 효과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수출 43%, 투자 15조, 고용 3만명…베트남 도시를 통째로 바꾼 ‘LG그룹의 저력’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하이퐁시는 수도 하노이와 함께 북부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항만·산업도시다. 하이퐁항과 락후옌 심해항 등 대형 항만시설을 비롯해 깟비 국제공항과 하노이~하이퐁시 고속도로까지 갖추고 있어 북부 내륙의 주요 생산거점과 해외 시장을 연결하는 물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최근에는 행정·경제적 위상도 한층 커졌다. 하이퐁시는 지난해 7월 인접한 하이즈엉성과 통합되면서 면적 3194.72㎢, 인구 약 466만명 규모의 중앙직할시로 재편됐다. 통합 이후 하이퐁시시의 지역 경제 규모는 베트남 전체 3위 수준으로 확대됐다.
하이퐁시는 2000년대 초부터 항만을 기반으로 한 물류 경쟁력과 대규모 산업단지, 수도 하노이와의 접근성 등의 장점에 힘입어 글로벌 제조기업들의 생산거점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일본 브리지스톤과 교세라, 미국 GE, 대만 페가트론, 홍콩계 레지나 미라클, 한국의 LG그룹 등이 연이어 진출했다. 이들 기업 중 투자 규모 면에서 LG그룹의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하이퐁시가 지난해 10월 기준 산업단지·경제구역 내 주요 외국인직접투자(FDI) 프로젝트를 집계한 결과, LG그룹의 누적 투자액은 105억9000만달러(한화 약 15조원)로 브리지스톤(12억2000만달러), 레지나 미라클(10억달러), 페가트론(9억달러) 등을 크게 웃돌았다.
LG그룹이 하이퐁시에 본격적으로 생산거점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다. 하이퐁시에 따르면 LG전자 베트남 하이퐁 법인은 2013년 9월 짱주에 산업단지에 대한 투자등록을 마친 뒤 2015년 3월 하이퐁 캠퍼스를 준공했다. 이후 다른 계열사들도 잇따라 하이퐁에 진출해 LG디스플레이는 2016년 4월 15억달러 규모의 투자허가를 받아 생산시설 구축에 나섰고 같은 해 LG이노텍도 5억5000만달러를 투입해 카메라 모듈 생산시설을 구축했다.
약 10년 넘게 이어진 LG그룹의 투자는 하이퐁시의 경제 생태계 변화는 물론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 하이퐁시 인민위원회가 올해 6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LG그룹은 현재 하이퐁시에서 7개 대형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LG 계열사 생산시설에서 발생하는 수출액은 하이퐁시 전체 수출액의 약 43%를 차지했다. 또 지난 2022년 기준 현지에 진출한 LG그룹 협력·위성기업은 50곳 이상으로 이들 기업의 투자액은 약 10억달러에 달했다. LG그룹을 비롯해 협력·위성기업의 고용창출 효과는 약 3만명 가량으로 추산됐다. 여기에 상권 형성, 교육 시설 확충 등에 따른 간접 고용효과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됐다.
하이퐁시 현지에서 LG그룹이 차지하는 위상과 관련해 LG그룹 관계자는 “하이퐁시는 항만과 공항, 고속도로 등 물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베트남 내수시장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으로 제품을 공급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생산·물류 거점으로 판단했다”며 “LG전자 진출을 시작으로 LG디스플레이와 LG이노텍 등 주요 계열사가 잇따라 생산시설을 구축하면서 자연스럽게 협력업체와 관련 산업 생태계도 함께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도 현지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하이퐁시와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LG가 바꾼 지역 상권의 변화…한국식 마트, 한식당 등 베트남의 ‘신흥 코리안타운’ 탄생
LG그룹 계열사의 생산시설이 밀집한 짱주에 일대의 주거환경에도 최근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산업단지 근로자를 위한 대규모 주거시설 조성이 대표적이다. 하이퐁시에 따르면 짱주에 산업단지 인근에서는 2023년부터 대규모 사회주택 단지인 ‘에버그린 짱주에(Evergreen Tràng Duệ)’가 조성되고 있다. 전체 사업면적은 3만1369㎡에 달하며 지상 15층 규모의 10개 동, 총 2538가구로 구성된다. 전체 가구 물량의 80%는 분양, 나머지 20%는 임대 방식으로 각각 공급된다. 이달 말 완공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대규모 주거시설 조성에 대한 현지 근로자들의 호응도는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이퐁 현지 매체에 따르면 짱주에 산업단지 내 LG디스플레이에서 기술자로 근무 중인 타지인 흐엉(Hướng) 씨는 지난해 10월 에버그린 사회주택 CT2동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는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현실이 돼 기쁘고 자랑스럽다”며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도 하이퐁시에 집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말했다. 해당 매체는 LG그룹 계열사의 대규모 투자를 일자리 창출을 넘어 타 지역 근로자의 유입과 주거 수요 증가, 가족 단위의 정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를 낳은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했다.
도시의 변화는 LG그룹 계열사 생산시설이 밀집한 짱주에 산업단지 주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하이퐁시의 대표 상권인 반까오(Văn Cao) 거리 일대에는 한국 음식점과 식료품점 등 한국인을 겨냥한 상업시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반까오 100번지에는 한국 식료품을 판매하는 ‘한국마트’가 자리 잡고 있으며 172A번지에는 한식 고깃집 ‘무쇠식당(Moo Soi)’, 182번지에는 한식당 ‘수원성(SUWONSUNG)’, 191번지에는 ‘아리랑 식당’ 등이 영업 중이다. 이 밖에도 ‘서울 순대국’, ‘오봉집’, ‘뚱보집’, ‘장군집’ 등 한국어 상호를 내건 음식점과 ‘케이마켓 하이퐁시(Kmarket Hai Phong)’ 등 한국 식료품점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이퐁시에서 새우 양식업체를 운영 중인 한성준 씨(59·남)는 “약 25년 전 처음 하이퐁시에 왔을 때만 해도 도시 개발 속도가 상당히 더뎠고 지금처럼 대규모 산업시설이나 생활 인프라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는데 LG그룹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도시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며 “하이퐁시에 진출한 기업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큰 곳을 꼽으라면 단연 LG그룹이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은 LG그룹 계열사나 협력업체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고 자연스레 한국인을 위한 상권과 생활 인프라도 많아졌다”며 “과거에는 하노이나 호찌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도시였지만 최근에는 산업과 물류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베트남을 대표하는 제3의 도시로 부상하고 있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기업 몰리자 국제학교도 속속…산업도시 하이퐁시 ‘신흥 교육도시’로 변신
하이퐁시의 교육환경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LG그룹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 주재원들과 가족들이 하이퐁시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자녀 교육을 위한 국제교육 수요가 함께 늘어난 영향이다. 영국의 국제 교육·문화기관인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이 지난해 베트남 주요 지역의 교육환경을 분석한 자료에선 하이퐁시가 ‘교육과 혁신의 새로운 관문(Emerging Gateway for Education and Innovation)’으로 별도 소개됐을 정도다. 당시 영국문화원은 항만과 산업단지, 국제무역망을 기반으로 하이퐁시의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외국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교육 인프라도 함께 확충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기준 하이퐁시에는 외국인 국제학교 2곳과 베트남 교육훈련부의 승인을 받은 통합교육 유치원 3곳, 대학 8곳 등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 하이퐁시를 대표하는 국제학교로는 ‘QSI 인터내셔널 스쿨 오브 하이퐁시(QSI International School of Haiphong)’가 꼽힌다. 학교가 위치한 곳은 하이퐁시 남동부 흥다오(Hưng Đạo) 지역의 ‘메린(Mê Linh)빌리지’로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짱주에 산업단지까지는 차량으로 약 30분, 도심의 대표 상권인 반까오 거리까지는 약 10~15분 가량 소요된다. QSI에 따르면 이 학교는 만 2세부터 18세까지 유치원과 초·중·고교에 해당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재학생은 200명이 넘는다. 학생들의 국적은 22개국 이상이다.
하이퐁시 내 국제학교 선택지는 최근 들어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싱가포르 교육기업 킨더월드 인터내셔널 그룹(KinderWorld International Group)이 하이퐁시 레쩐 지역에 ‘싱가포르 국제학교(Singapore International School·SIS)’를 공식 개교했다. 학교는 3만㎡가 넘는 부지에 조성됐으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베트남 학생과 외국인 학생을 모두 대상으로 싱가포르식 교육방식과 국제 교육과정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상급 과정은 Cambridge IGCSE와 A-Level 과정으로 이어진다. Cambridge IGCSE는 영국식 중등교육과정에 기반한 국제 공인 자격과정이며 A-Level은 이후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이수하는 영국식 고등교육 진학 자격과정이다.
로봇과 코딩 등을 포함한 STEM 교육도 정규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다. 킨더월드 측은 하이퐁시가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과 함께 외국인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성장도시라는 점을 학교 설립 배경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다. 싱가포르 국제학교 역시 짱주에 산업단지는 차량으로 약 30분, 반까오 거리까지는 약 10분이 소요되는 등 외국계 기업 주재원들의 기존 주거·생활권과 인접해 있다.
올해 5월에는 하이퐁시시 인민위원회와 교육훈련국이 미국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샤턱-세인트 메리스 인터내셔널 스쿨 베트남(Shattuck-St. Mary’s International School Vietnam·SSM Vietnam)’의 초·중·고교 설립과 교육활동을 공식 허가했다. 이 학교는 미국식 교육과정을 기반으로 유치원부터 초·중·고교 단계까지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상급 과정에서는 미국 대학 진학 등에 활용되는 AP(Advanced Placement) 과목을 제공할 예정이다. 일반 교과과정 외에도 미국 본교의 융합교육 모델인 ‘ScholarShift’와 디지털 미디어·음악·창작 활동 등을 지원하는 ‘weCreate’를 비롯해 골프·조정·펜싱·공연예술 등 다양한 특화 프로그램도 운영할 방침이다. 기숙 프로그램과 체육·문화시설도 함께 갖춰 하이퐁시에 장기간 체류하는 외국인 주재원 자녀는 물론 베트남 북부 지역의 국제교육 수요까지 흡수한다는 계획이다.
한국 기업과 주재원 증가에 따른 지역 사회의 변화는 현지인을 위한 공교육 부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원활한 인력 조달을 통해 재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하이퐁시 교육훈련국은 2024~2025학년도부터 일반 초·중등학교에서 한국어를 제1·제2외국어로 가르치는 정규 교육과정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시행 1년을 맞아 하이퐁시 교육훈련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어 수업에는 베트남인 교사 7명과 한국인 교사 4명 등 총 11명의 교사가 투입됐다. 정규 교육과정과 별개로 하이퐁시 지역 7개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동아리 형태의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하이퐁시 교육당국은 앞으로 한국어 교육 대상 학교를 확대하는 한편, 학교급 간 연계 교육과정과 교원 확보 방안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현지 교육 환경 개선 노력도 활발한 편이다. 올해 하이퐁시는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의 교실과 교육시설 확충에 1조5800억동(한화 약 855억원) 이상, 고등학교 시설 개선에 1920억동 이상을 각각 배정했다. 별도로 쩐푸(Trần Phú)·응우옌짜이(Nguyễn Trãi) 영재고등학교 등 전문교육기관의 시설 확충에 1조2940억동 이상, 각급 학교의 교육장비 확충에도 3530억동 이상을 투입하기로 했다. 하이퐁시 교육훈련국은 이러한 투자를 바탕으로 2030년까지 학교와 교육시설을 표준화·현대화하는 것을 지역 교육 발전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로 추진하고 있다.
하이퐁시는 교육 인프라 확충과 함께 외국인 전문 인력의 장기 체류를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 개편에도 나섰다. 하이퐁시 내무국은 올해 5월 자유무역지대에 본사를 둔 기업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가운데 전문가와 과학자, 관리자, 고급인력 등을 별도로 인정하기 위한 자격 기준 마련에 착수했다. 자유무역지대에 적용되는 특례에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외국인 전문인력에 대한 비자 발급과 장기체류 지원 방안도 포함돼 있다. 해외 기업의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 기업에서 근무하는 경영진과 엔지니어, 연구개발 인력 등이 하이퐁시에 장기간 머물 수 있도록 정주 여건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하이퐁시에 진출하는 글로벌 기업과 외국인 전문 인력이 늘어날수록 이들과 가족들의 장기 정착을 뒷받침할 국제학교와 주거·상업시설 등 생활 인프라에 대한 수요도 함께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특정 지역에 대규모 산업시설이 들어서 산업이 발전하면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인구가 유입되고 이는 지역 내 소비 증가와 상권 활성화로 이어진다”며 “특히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근로자와 주재원, 가족 등의 유입이 늘어나면 이들을 대상으로 한 주거·교육·상업시설의 인프라가 늘어나며 이는 다시 현지 주민들의 생활 여건 개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결국 산업 발전이 고용과 인구 증가를 이끌고 늘어난 인구와 소비가 다시 지역 인프라 확충과 추가적인 투자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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