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한 기업이 인문계열 전공자만 지원할 수 있는 채용공고를 내면서 ‘인문학적 소양’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인문학적 소양이 마치 특정 전공자만 갖출 수 있는 역량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이공계 전공자가 전공과 무관한 직무에서 성과를 내거나 인문계열 전공자가 기술·영업 등 다른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는 사례가 적지 않다. 사람의 역량을 대학 전공만으로 구분하거나 인문학적 소양을 특정 계열의 전유물로 보는 시각은 변화한 노동시장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공보다 중요한 건 소통…직장인들이 말하는 인문학적 소양
대학 전공과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업무 성과를 좌우하는 요인으로 전공 지식보다 문제 해결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꼽았다. 인문학적 소양 역시 특정 계열에서만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회생활과 독서, 다양한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충분히 기를 수 있는 역량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지방 4년제 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을 졸업한 최은선 씨(29·여)는 현재 전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국내 게임회사에서 품질보증(QA) 업무를 맡고 있다.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과 현재 직무의 연관성은 사실상 없지만 공학을 공부하며 익힌 데이터 분석 능력은 업무 과정에서 일부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씨는 “전공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업무 자체에 흥미를 느껴 현재 직무를 선택하게 됐다”며 “회사에서는 전공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업무에 사용하거나 필요한 역량 대부분을 대학에서 배웠다기보다는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익힌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특히 여러 부서의 의견을 조율하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최 씨는 “‘인문학적 소양은 문과생만의 강점’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인문학적 소양은 특정 전공을 이수해야만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는 경험을 통해 누구나 쌓을 수 있는 역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서원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정종현 씨(29·남)는 현재 인공지능(AI) 에이전트와 키오스크, 포토부스 등 기술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MUFI(무피)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 배운 컴퓨터공학 지식을 기반으로 제품을 설계하고 개발하는 것은 물론 영업과 고객 대응, 조직 운영, 사업 기획까지 직접 맡고 있다. 정 씨는 전공이 현재 업무의 기반은 됐지만 사업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역량 대부분은 현장에서 쌓았다고 설명했다.
정 씨는 “컴퓨터공학에서 배운 논리적 사고와 시스템 설계 방식은 제품을 만들고 문제를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반면 고객을 설득하고 조직을 운영하며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대부분 실제 일을 하면서 익혔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에서는 전공보다 실행력과 학습 능력, 소통 능력, 책임감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며 “전공보다 필요한 것을 빠르게 배우고 해결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현재 업무를 수행하면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있다고도 했다. 정 씨는 “고객이 요구하는 기능보다 그 요구를 하게 된 배경과 불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며 “팀원과 고객을 설득하거나 갈등을 조율해야 할 때도 사람의 말 자체보다 그 이면의 맥락을 읽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 씨는 “‘인문학적 소양은 문과생만의 강점’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인문학적 소양은 특정 전공의 장점으로 보기보다 타인의 관점과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고 자신의 판단을 성찰하는 태도에 가깝다고 느낀 적이 많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공은 출발점일 뿐이며 직무 역량은 결국 현장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공계 전공자가 사업을 운영하거나 고객을 상대하는 과정에서도 기술 지식만으로는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제품을 설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전공 지식이 필요하지만 고객의 요구를 파악하고 구성원을 설득하며 조직 내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는 타인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졸자 절반은 전공과 다른 직장…전문가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도 변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최상준 씨(56·남)는 현재 국내 중소기업에서 20년 넘게 철강 영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과 현재 업무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거의 없지만 오랜 기간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영업은 물론 인사 업무까지 맡아왔다고 밝혔다.
최 씨는 “대학을 졸업할 당시가 IMF 외환위기와 맞물리면서 전공에 맞는 일을 찾기보다는 당장 취업해 회사를 다니는 것이 더 절실했던 시기였다”며 “주변에도 회사가 문을 닫거나 구조조정을 당하는 사람이 많아 전공과 직무의 연관성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처음에는 전공과 전혀 다른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을 하면서 영업에 필요한 역량은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보다 고객과 소통하고 신뢰를 쌓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수십 년 동안 현장에서 경험을 쌓다 보니 전공과는 별개로 필요한 역량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다”고 말했다.
또 “영업 업무 자체를 인문계열 출신이 더 잘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 함께 일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며 “인문계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사람을 잘 이해하거나 소통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이공계 출신 가운데서도 협업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몇 년 전 인사 업무를 맡으며 채용에도 참여했는데 전공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고 느꼈다”며 “결국 기업에서 사람을 채용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배우려는 태도와 책임감,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이지 문과냐 이과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반대로 대학에서 인문계열 학과를 전공했지만 현재는 전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직장인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이들 역시 직장생활을 통해 쌓은 경험과 소통 능력이 대학에서 배운 전공 지식보다 실제 업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입을 모았다.
직장인 박시현 씨(33·남)는 “대학에서는 관광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국내 한 중소기업에서 영업 업무를 맡고 있다”며 “매주 여러 지역을 출장 다니며 다양한 고객을 만나는데 제품을 잘 아는 것만큼 상대방과 신뢰를 쌓고 원활하게 소통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박 씨는 “학창 시절에는 여행이 좋아 관광을 전공했고 관련 분야에서 일하면 만족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며 “첫 직장을 여행사에서 시작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여행은 취미로 즐기는 것이 더 잘 맞는다고 판단해 직무를 바꾸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업무에서 대학에서 배운 전공 지식을 직접 활용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영업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소통하며 내가 다루는 제품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오히려 전공 지식보다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쌓인 경험이 업무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인문계열 학생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접할 기회가 더 많고 그런 부분에서 강점을 가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과거에 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수학이 싫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0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길러졌다”며 “인문학적 소양 역시 특정 전공보다 사회 경험과 경력을 통해 충분히 키울 수 있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현상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발간한 ‘한국 노동시장 내 미스매치와 직장과 삶에서의 만족도’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대졸자의 49%는 대학 전공과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38%보다 11%p 높은 수준이다.
대졸자 두 명 중 한 명이 전공과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대학 전공과 실제 직무가 일대일로 연결되지 않는 국내 노동시장의 현실을 보여준다. 산업 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직무 간 경계가 흐려지면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능력도 특정 분야의 지식에서 새로운 문제에 적응하고 다른 구성원과 협업하는 역량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 역시 직무가 세분화되고 여러 분야가 융합되는 시대에는 전공보다 문제 해결 능력과 소통 능력 등 실질적인 직무 역량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전공 지식이 직무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기술과 산업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입사 이후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고 다양한 직군과 협업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며 “기업들이 전공보다 직무 적합성과 성장 가능성을 함께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인문학적 소양 역시 특정 계열 학생만의 능력으로 보기 어렵다”며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하며 조직 안에서 원활하게 소통하는 능력은 사회 경험과 독서, 협업 과정에서도 충분히 길러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문과와 이과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보다 기술적 사고와 인문학적 사고를 함께 갖춘 융합형 인재를 요구하는 것이 최근 산업계의 흐름이 됐다”며 “전공은 출발점일 뿐 직무 역량은 끊임없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완성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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