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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불 논란’ 딛고 일어선 ‘호프’…영상물 심사 기준 ‘정상화’ 궤도
‘청불 논란’ 딛고 일어선 ‘호프’…영상물 심사 기준 ‘정상화’ 궤도

나홍진 감독의 신작 SF 영화 ‘호프(HOPE)’가 극장 상영을 이어가는 가운데 영화의 연출 수위를 둘러싸고 제기된 등급 적절성 논란이 오히려 한국 영상물 등급 심사가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개봉 이후 일각에서는 영화 속 유혈 연출과 신체 훼손 묘사, 그리고 극 중 특정 비속어가 137회 이상 반복된다는 점을 들어 ‘청소년 관람불가(청불)’ 지정이 타당하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미확인 외계 존재의 공격으로 발생하는 참혹한 살상 장면이나 인체 장기 노출 및 해부 장면,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강한 대사 표현 등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일부 관람객들은 시체가 낭자하고 신체가 절단되는 묘사 수준에 놀라움을 표하며 등급 분류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계와 미디어 학계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르다. 이들은 이번 ‘15세 관람가’ 판정을 두고 과거 유독 보수적이고 경직돼 있던 국내 영상물 등급 심사 기준이 마침내 선진화된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OTT 플랫폼의 확산으로 미디어 수용 환경의 표현 스펙트럼이 대폭 넓어진 다매체 시대에 서사적 맥락을 배제한 채 단편적인 대사 횟수나 시각적 묘사만을 이유로 청불 판정을 내리는 것은 과거 K-콘텐츠의 창작 자율성을 위축시켰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 대다수의 수용자들과 학부모들 역시 이러한 변화를 반기는 분위기다. 디지털 환경의 발달로 청소년들이 이미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며 충분한 수용 능력을 갖춘 만큼 지나치게 자극적인 목적의 연출이 아니라면 서사적 필요성에 따른 표현을 제한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과거 영화 ‘범죄도시’ 등 장르적 특성이 뚜렷함에도 과도하게 엄격한 잣대로 청불 판정을 받았던 사례들과 비교할 때, 이번 조치가 훨씬 현실적이고 현명한 기준이라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영화 예매하는 시민 모습. ⓒ르데스크

 

한국의 영상물 등급 심사는 과거 유난히 빡빡하고 과도한 잣대를 적용해 콘텐츠 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특정 연출 장면만을 문제 삼아 사실상 상영을 막았던 ‘악마를 보았다’의 제한 상영 문제, 청소년의 현실적인 입시 비극 메시지를 담았음에도 일부 폭력성 연출만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매겼던 ‘명왕성’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계에서는 이처럼 장면이나 특정 단어의 빈도수 위주로 행해지던 보수적 심사가 창작 활동을 제약하는 사전 검열로 작용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왔다.

  

이번 ‘호프’에 내려진 15세 판정은 단편적 잔혹성이나 단어 빈도수에 얽매이던 과거의 억압적 심사에서 벗어나 장르적 맥락과 작품 전체의 서사를 종합 평가하는 선진적 심사 기준이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 역시 등급 분류 사유서를 통해 이러한 정상화된 심사 기준을 명확히 밝혔다.

 

영등위는 호프 등급 심의에 대해 “괴생명체와의 사투 과정에서 발생하는 살상, 유혈, 신체 훼손 표현 및 강한 대사가 존재해 심리적 공포와 긴장감을 유발한다”며 “해당 표현이 비현실적인 SF 장르적 설정 및 극한의 생존 상황에 기반하고 있으며, 구체적이거나 지속적으로 모방을 유도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비현실적인 외계 존재라는 위기 상황 속 대사와 연출이라는 장르적 개연성을 감안할 때 15세 이상 청소년의 지식과 경험으로 충분히 수용 가능한 정상 범주라는 판단이다.


이러한 영등위의 정상화 기조는 주요국의 등급 심사 기구 가이드라인과도 궤를 같이한다. 미국 영화협회(MPAA), 영국(BBFC), 일본(EIRIN), 독일(FSK) 등 해외 심사 기관은 SF 및 스릴러, 서사극 장르물에서 비현실적 요소나 신화적·전쟁 상황 속 수위 연출에 대해 장르적 맥락을 고려해 연령 제한을 적용한다. 신화 속 괴수와의 전투나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잔혹한 전투 유혈 묘사로 수위 논란이 일었던 대작 영화 ‘오디세이’의 경우 미국 MPAA로부터 R등급 판정을 받았으나, 신화적 판타지라는 장르적 틀과 서사적 필연성을 높게 평가받아 국내 영등위에서는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개봉됐다.


▲ 영화 ‘오디세이’ 입간판 사진. ⓒ르데스크


또 다른 해외 사례인 ‘에일리언: 커버넌트’(2017)의 경우, 미국 MPAA로부터 R등급을 받았으나 국내 영등위와 영국 BBFC에서는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동일 시리즈인 ‘프로메테우스’(2012)는 미국 R등급, 영국 15세 등급을 받은 반면, 당시 국내 영등위에서는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내려 한국의 심사 기준이 얼마나 유독 경직돼 있었는지를 보여준 바 있다. 한편 외계 존재와의 사투를 다룬 ‘클로버필드 10번지’(2016)와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 등은 국내에서 15세 관람가로 분류됐으며, 미국 PG-13, 영국 12A 및 15세, 독일 12세 및 16세, 일본 PG12 등 해외에서도 연령 제한이 유연하게 적용됐다.


해외 기구별 세부 기준을 보더라도 유혈, 공포, 거친 대사 연출을 유연하게 수용하는 것이 글로벌 표준이다. 미국 MPAA는 PG-13 등급 심사 시 묘사의 지속성과 현실성 여부를 지표로 삼아 비현실적 대상과의 사투 장면을 유연하게 평가한다. 영국 BBFC는 15세 등급 가이드라인에서 서사적 맥락과 장르적 틀 안에서 정당화되는 잔혹성과 강한 대사 수위를 허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본 EIRIN은 PG12 등급 적용 시 SF·판타지물의 모방 위험성 부재를 검토하며, 독일 FSK는 12세 및 16세 등급 심사에서 공포·유혈 묘사가 현실 세계와 분리되는지를 평가 기준으로 둔다.

 

미디어 및 문화예술 전문가들 역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한 다매체 시대에 발맞춰 영상물 등급 심사의 유연성이 확대되는 흐름을 자연스럽고 타당한 변화로 평가했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과거 극장과 TV로 시청 매체가 이원화돼 있던 시절에는 등급 심사의 준거 틀이 상대적으로 편협하고 엄격했던 것이 사실이다”며 “하지만 OTT 플랫폼이 미디어의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수용자들의 콘텐츠 경험 수위가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등급 판단 기준에도 자연스럽게 유연성과 신축성이 반영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영상물 등급 심사의 정성적 평가 특성을 짚으며 “주제, 폭력성, 대사, 모방 위험 등 다양한 요소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OTT 시대의 환경적 변화가 심사위원들의 정성적 판단 기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호프’에 내려진 15세 관람가 판정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시청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등급 완화가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콘텐츠의 본질과 관객 저변 확대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등급이 청불에서 15세로 낮아졌다고 해서 관객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식의 파급효과가 단기적으로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수용자 저변을 넓히고 창작의 표현 영역을 신축적으로 확장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방향이다”며 “이미 아동·청소년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고수위 콘텐츠에 노출돼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시대 변화에 맞게 등급 분류의 유연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은 한국 콘텐츠 산업의 저변을 넓히는 데 긍정적 기여를 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기사 속 Q&A
Q1.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등급 분류 사유서를 통해 밝힌 영화 '호프'의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의 판단 근거는?
A. 살상과 신체 훼손 표현 및 강한 대사가 존재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SF 장르적 설정과 극한 생존 상황에 기반하고 있으며 구체적이거나 지속적으로 모방을 유도하지 않아 15세 이상 청소년의 지식과 경험으로 수용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Q2. 해외 등급 심사 기구가 SF 및 스릴러 장르물의 수위를 평가할 때 적용하는 핵심 가이드라인은?
A. 미국 MPAA는 묘사의 지속성과 비현실적 대상과의 사투라는 현실성 여부를 기준으로 삼으며, 영국 BBFC는 서사적 맥락과 장르적 틀 안에서 정당화되는 잔혹성과 대사 수위를 유연하게 허용한다.
Q3. 미디어 정책 학계가 제시하는 일률적 검열의 대안으로서, 창작 자율성 보장과 수용자 보호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현실적인 정책 해법은?
A. 보수적인 연령 제재 대신 예매 및 고지 단계에서 유혈, 언어, 공포 등 세부 콘텐츠 주의 정보를 사전에 강화하여 수용자가 스스로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체계를 전환하는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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