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HD현대오일뱅크와 내부 임직원들이 유가담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가운데 과거 HD현대오일뱅크가 해외 시장에서도 비슷한 행태를 저지른 사실이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는 지난 2005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 현지 유류 납품 과정에서 장기간 담합을 주도해 미국 법무부로부터 거액의 벌금을 부과 받은 바 있다. 법조계 안팎에선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한 정부의 엄중 처벌 의지와 과거 해외에서의 비슷한 전적까지 보유한 사실 등은 향후 재판의 중대한 악재가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고유가에 국민 한숨 커질 때 뒤에선 담합 획책…HD현대오일뱅크의 삐뚤어진 돈벌이
정유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 6일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타사와 유가 인상 시기 및 규모를 공유해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HD현대오일뱅크 가격 결정부서 부서장 A씨를 구속 기소하고 책임 매니저 B씨와 법무실장 C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아울러 검찰은 HD현대오일뱅크를 포함한 국내 정유 4사(HD현대오일뱅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 법인 전체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다만, SK에너지는 자진신고자 감면제도 적용에 따라 임직원에 대한 기소를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는 지난 2024년 7월부터 가격 정보를 상호 교환하며 특정 시점(전쟁 발발 등)에 맞춰 일제히 가격을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이 담합한 금액은 총 14조2000억원 규모이며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의 추종 인상분까지 합산하면 전체 담합 효과는 26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이번 담합을 주도한 HD현대오일뱅크의 부서장은 과거 SK에너지에서 가격 결정 업무를 담당했던 경력을 활용해 합의를 이끈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HD현대오일뱅크가 자영주유소와 맺은 ‘전량구매 계약’을 악용해 주유소 간 가격 경쟁을 원천 차단하고 위약금 소송 등을 통해 거래처를 압박해온 관행도 확인했다. 또 회사 내부에서 계약을 이탈하거나 가격 경쟁을 시도하는 주유소를 ‘악성 거래처’로 분류하고 소송을 통해 제재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간 정황도 파악했다. HD현대오일뱅크와 임직원이 공정위 현장조사 일정을 미리 파악하고 전산 자료와 메신저 대화를 삭제하는 등 조직적 증거인멸에 나선 사실도 포착했다.
이번 사건은 해외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질 정도로 상당한 파장을 낳고 있다.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 분석 전문 기관인 영국의 ICIS는 이번 사건을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노출된 만성적이고 제도화된 담합 관행’이라고 규정한 내용을 인용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스트레이츠 타임스 역시 한국 검찰의 정유업계 기소 사실을 상세히 소개하며 유가 담합의 문제점을 요목조목 짚었다.
이번 유가 답합 사건을 계기로 과거 HD현대오일뱅크가 해외에서 저지른 크고 작은 담합 행위 논란들도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 남부연방법원에 제출된 민사 판결문과 형사 공소장에 따르면 HD현대오일뱅크는 2005년 3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약 11년 7개월간 다른 국내 정유·물류 업체들과 함께 주한미군 유류 공급계약과 관련한 담합에 가담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이 단순한 가격 정보 교환을 넘어 계약 갱신 시기마다 회의와 전화, 이메일 등을 통해 낙찰 업체와 가격 등을 사전에 조율하며 경쟁을 제한하기 위한 공모를 지속한 것으로 판단해 2019년 HD현대오일뱅크에 총 8310만달러(한화 약 1240억원 상당) 규모의 형사 벌금과 민사상 합의금을 부과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2005년 당시 미 국방군수국(DLA)이 한국 내 미군기지 연료 공급을 위해 ‘SP0600-05-R-0063’ 입찰을 발주하자 HD현대오일뱅크와 타 정유·물류업체 관계자들은 2005년 3월과 4월경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각사의 공급 물량 배분과 최저 입찰가를 사전에 협의했다. 입찰 마감 직전인 같은 해 4월 29일경에는 HD현대오일뱅크 관계자가 합의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타 업체 관계자들에게 발송했다. 결국 같은 해 5월 실시된 입찰에서 HD현대오일뱅크는 사전에 배분받은 미군기지 공급 물량을 낙찰 받았으며 다른 업체에 배분된 공급 물량에 대해서는 낙찰 받지 못할 수준의 높은 가격을 제출하는 등 사실상 경쟁하지 않기로 한 합의를 이행했다.
담합은 단 한 번의 입찰로 끝나지 않았다. 2006년 8월 미 국방군수국(DLA)이 추가 보충입찰(입찰번호 SP0600-05-R-0063-0001)을 실시하자 HD현대오일뱅크를 비롯한 국내 정유사들은 또 다시 담합을 모의했다. 2006년 7월 각사의 공급 물량을 재차 배분하고 항목별 최저 입찰가를 조율했다. 해당 보충입찰은 2005년 체결된 PC&S 계약의 일부 물량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공급기간은 2006년 2월부터 2009년 7월까지였다. 미국 국방부가 본 계약과 보충계약에 따라 업체들에 지급한 금액은 총 약 2억5400만달러(한화 약 3800억원)에 달했다.
해당 계약 담합이 이어지던 시기 HD현대오일뱅크는 별도의 주한미군 유류 공급계약 담합에도 가담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2008년 육군·공군 교역처(AAFES)가 발주한 연료 공급계약 입찰에서 SK에너지와 경쟁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HD현대오일뱅크 측과 SK에너지는 입찰 참여 요청을 받고도 담합 합의에 따라 입찰하지 않았고 결국 SK에너지가 경쟁이 제한된 상태에서 계약 따냈다. 이후 SK에너지는 2008년 7월부터 2013년 7월까지 해당 AAFES 계약을 수행했다.
HD현대오일뱅크, 10년간 5차례 담합에 증거 인멸까지 동원한 조직적 은폐 들통
HD현대오일뱅크의 담합 행위는 2009년 계약에서도 반복됐다. 미 국방군수국(DLA)은 2008년 11월 입찰번호 ‘SP0600-08-R-0233’으로 새로운 주한미군 주둔지·캠프·기지 연료 공급계약(PC&S)을 발주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기존 담합 공모에 참여했던 정유·물류업체들과 다시 접촉해 각 회사가 가져갈 미군기지별 공급 항목을 사전에 배분하고 다른 업체에 배분된 물량에 대해서는 낙찰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을 제출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HD현대오일뱅크는 담합 사실에 대한 조직적 은폐까지 시도했다. 2008년 12월 13일경 HD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공급 물량 배분과 가격 조정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타 업체 관계자들에게 발송한 뒤 즉시 삭제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낙찰 과정에서 사전에 배분된 공급 물량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HD현대오일뱅크는 입찰 결과에 따르는 대신 해당 업체와 별도 합의를 통해 실제 연료 공급은 자신들이 하되 계약은 다른 정유사가 하도록 조정하는 행위도 저질렀다. 의도치 않게 사전 합의와 다른 낙찰 결과가 나오자 실제 공급 주체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당초 물량 배분안을 유지한 것이다. 2009년 체결된 PC&S 계약은 2009년 10월부터 2013년 8월까지 유지됐으며 해당 기간 미 국방부가 지급한 전체 대금은 약 2억8000만달러(한화 약 4200억원)에 달했다.
HD현대오일뱅크의 담합 행위는 2012년에도 있었다. 2012년 미 국방군수국(DLA)이 새로운 PC&S 계약 입찰을 발주하자 HD현대오일뱅크는 또 다시 정유·물류업체들과 접촉해 미군기지별 공급 물량과 입찰가를 협의했다.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사전에 전화와 이메일 등을 통해 항목별 낙찰자를 정하고 다른 업체에 배분된 물량에 대해서는 낙찰 가능성이 없는 수준의 높은 가격을 제출하기로 합의하는 식이었다. 다만, 당시 HD현대오일뱅크는 주요 물량을 낙찰 받는데 실패했다.
미국 검찰은 10년 넘게 이어진 HD현대오일뱅크의 행위를 단순한 가격 정보 교환이 아닌 조직적인 입찰 경쟁 제한 행위로 판단했다. 또 미 연방 대배심(형사사건에서 피의자를 기소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시민 배심원단)은 2018년 9월 HD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 관련 임직원들에 대한 기소를 결정했다. 공소장 제1항에는 주한미군 유류 공급 입찰 과정에서 경쟁을 억제·제거하기 위해 가격과 낙찰자를 사전에 조율한 혐의가, 제2항에는 미국 정부의 정상적인 조달 절차를 방해하고 기망하기 위한 공모 혐의가 각각 적용됐다.
미국 법무부는 2019년 3월 HD현대오일뱅크와 에쓰오일이 주한미군 연료 공급 입찰 담합과 관련한 반독점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두 회사가 합계 약 7500만달러의 형사 벌금을 납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두 회사는 별도로 민사 반독점법과 연방 허위청구법(False Claims Act) 관련 청구를 해결하기 위해 합계 약 5200만달러도 추가로 지급했다. 이 가운데 HD현대오일뱅크의 부담액은 형사 벌금 약 4400만달러와 민사상 지급액 3910만달러를 합한 총 8310만달러였다.
국내 전문가들은 HD현대오일뱅크가 2005년부터 2016년까지 10년 넘게 미국에서 반복적인 유류 납품 담합에 가담해 형사·민사 제재를 받은 전례가 있다는 점은 최근 국내 가격 담합 사건과 맞물려 기업에 악재가 될 만한 사안이라고 꼬집었다. 김계수 세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법원이 담합이라고 규정지은 HD현대오일뱅크의 행위는 우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며 “2005년에 이어 2006년, 2008년, 2009년, 2013년 등 계약 갱신 때마다 주요 업체들과 답합을 조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사전 합의와 다른 낙찰 결과가 나오자 실제 공급사를 바꾸고 담합 이메일 삭제까지 지시한 정황은 오랜 기간 치밀하게 기획된 조직적 범죄임을 방증한다”며 “이익을 위해 공정한 경쟁 질서를 파괴한 것은 도덕적 해이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신뢰도를 훼손하는 심각한 일탈 행위다”고 비판했다.
일련의 사안과 관련, HD현대 관계자는 “HD현대오일뱅크의 미국 담합사건의 경우 당사뿐만 아니라, 국내 정유사 모두 관련된 내용이었다”며 “당시 이메일 등 조직적인 증거 인멸은 당사 포함 국내 정유사들 관련 내용이 아니라 전직 미국 군 관련 계약업자의 내용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사는 그동안 준법경영 체계 강화 등 다양한 내부통제 및 컴플라이언스 조직을 운영해왔다”며 “향후에도 개선 조치 및 준법 경영 체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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