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의 분노가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기성세대와 그들이 주축인 정치권 등에서는 정치 성향에 따른 이분법적 시각으로 사태의 원인을 규정짓기 바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청년들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적개심과 좌절감이 결정적 이유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취업·결혼·자산형성 등의 기회 상실에 따른 좌절감 ▲스스로 기득권임을 인정하지 않은 기성세대의 위선 ▲청년 정서와 괴리된 기성세대의 공정·정의 기준 등을 이유로 지목했다.
“참정권 침해 사태는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시스템의 민낯”
6·3 지방선거가 종료된 지 수일이 흘렀지만 투표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사회적 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앞서 투표소와 개표소 봉쇄 시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청년들은 지금도 한껏 격양돼 있다. 주말·평일 할 것 없이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 현장을 찾는가 하면 개인 SNS 등을 통해 참정권 침해를 규탄하고 있다. 청년세대 과반 이상의 득표율을 얻은 후보가 당선됐지만 그들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행동의 배경 자체가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특정 후보의 유·불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방증이다. 자연스레 관심은 분노를 유발한 심리적 배경에 쏠리고 있다.
르데스크는 잠실 개표소가 위치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 서울 주요 대학가와 인근 상권 등과 더불어 각종 SNS 플랫폼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청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수일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 결과, 청년들이 참정권 침해를 외치는 행동 이면에는 ‘기성세대의 책임론’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확인됐다. 또한 그동안 기성세대가 보여온 말과 행동에 대한 강한 불만이 책임론의 주된 원인으로 분석됐다. 정리 하면, 투표지 부족 사태와 이에 따른 참정권 침해의 근본적 원인은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시스템의 부실 때문이라는 게 대다수 청년들의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기성세대에게 이토록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됐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유독 많이 언급된 내용은 딱 3가지였다. 성장 기회 박탈, 위선적 언행, 공정·정의 인식 괴리 등을 지적하는 반응이 유독 많았다. ‘잠실 개표소’ 앞에서 만난 대학생 장수진 씨(21·여·가명)는 “나도 그렇고 주변에도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사람들 별로 없다”며 “모든지 정치 성향으로 갈라치기 하려는 기성세대 때문에 다소 변질되긴 했지만 청년들이 여기 온 이유는 정치 성향 때문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식적으로 투표지가 부실한 게 말이 되나”며 “바로 이런 모습이 기성세대가 만든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에서 만난 직장인 강정훈 씨(33·남·가명)는 “우리 사회가 부실 투표까지 벌어질 정도로 망가진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절대적이라고 본다”고 운을 뗐다. 그는 “불과 10년 전에 비해 미친 듯이 오른 집값이 다 누구 때문인가”라며 “빚투, 갭투자 같은 걸로 마구잡이로 집값을 올려놓은 게 지금의 기성세대 아닌가. 우린 그 시절에 공부만 하고 있었다”고 성토했다. 강 씨는 “집값 때문에 희망 자체가 사라졌는데 정부는 임대주택만 늘리겠다고 한다”며 “기성세대는 이미 집 한 채씩 다 가지고 가만있어도 자산 규모가 커지는데 청년들에겐 내 것도 아닌 임대주택 만들어 줄테니 잘 살아보라고 하면 누가 좋아 하겠나”라고 꼬집었다.
국토교통부, 한국부동산원 등에 따르면 서울 신축 아파트 국민 평형대(전용 84㎡) 평균 매매가는 2015년 5억여원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엔 12억2660만원으로 급등했다. 무려 2배 넘는 상승률이다. 같은 기간 경기도 역시 3억2644만원에서 5억3881만원으로 1.6배 올랐다. 반면 취업포털 잡코리아, 한국고용정보원 등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 평균 연봉은 2015년과 지난해 모두 3000만원대 초반 수준을 기록했다. 10년 전 신입사원과 지금의 신입사원은 내 집 마련 난이도 자체가 판이하게 다른 셈이다.
“기득권층 약자 행세 볼 때면 무시당하는 기분” “청년들 바보 만드는 결과의 평등에 분노”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고 칭하는 이들의 위선적 태도가 결정적인 분노 유발 포인트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 인근에서 만난 대학원생 박연정 씨(25·여·가명)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의 지금 나이가 60세가 넘고 당시 ‘학생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됐는데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약자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모든 말과 행동을 정당화 시킨다”며 “과거 ‘조국사태’ 그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다”고 꼬집었다. 이어 “교수 타이틀에 번듯한 아파트 한 채씩 가진 그들이 ‘청년의 고통 어쩌고’하면서 마치 우리를 전부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보면 고맙기는 커녕 오히려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부연했다.
‘잠실 개표소’ 앞에서 만난 직장인 장민우 씨(36·남·가명)는 “사실 우리 세대는 정치나 이념에는 크게 관심 없다”며 “선거 때도 ‘누가 옳고, 누가 좋고’가 아니라 ‘누가 더 싫고, 누가 더 잘못했고’를 더 많이 따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 이곳에도 많은 청년들이 있는데 공부, 취업 준비, 직장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 과연 특정 정당이 좋아서, 또는 특정 이념을 추구해서 여기에 왔겠나”라며 “결국 우리가 움직인 것은 분노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장 씨는 “나 같은 경우는 기성 정치인들의 위선이 너무 싫다”며 “기성세대 표심 잡느라 국민연금·의료보험을 방치하면서 청년들을 위한다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가”라고 꼬집었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에 강한 반감을 표출하는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보편적 복지와 평등, 호봉제, 친노조 정책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됐다. 강남역에서 만난 김진환 씨(28·남·가명)는 “예전에 ‘인국공 사태’나 ‘블라인드 면접’ 같은 걸 보고 기성세대에 강한 반감이 생겼다”며 “사회생활에서의 격차는 개개인의 노력 정도에 따라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당시 정책을 보고 ‘우리는 무시 당하는 존재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피력했다. 지난 2020년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45.0%가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을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특히 20대의 경우 같은 응답 비중은 55.9%로 다른 연령대에 비해 유독 높았다.
‘잠실 개표소’ 앞에서 만난 대학생 양지승 씨(31·남·가명)는 “최근 대기업 노조의 행태를 보면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싫다”며 “회사 미래와 직결된 잉여금을 성과급으로 내놓으라하고 알량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년연장까지 요구하고 있는데 그럼 우리 같은 청년들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라는 소린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노조의 행태를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나다 보니 이런 노조에게 유리한 정책만 쏟아내는 (더불어)민주당도 덩달아 미워진다”며 “말로는 정의·공정을 외쳐대면서 정작 하는 행동은 정반대이니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나”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청년들에게도 최소한의 기회만 주더라도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며 “정의와 공정, 평등은 전부 기회와 과정에 적용되는 개념일 뿐 결과에서 보장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분노는 지금까지 기득권에 가까운 기성세대가 보여 온 말과 행동에 대한 평가의 결과물인 만큼 앞으로 정부·여당이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법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청년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앞으로의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청년들의 눈높이에서 비호감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의 2030 세대는 과거 ‘조국 사태’ 등을 거치며 진보 진영의 위선을 직접 목격했고 그 과정에서 공정의 가치가 무너지는 것에 깊은 환멸을 느낀 세대다”며 “청년들이 가장 분노하는 지점은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과 심화된 빈부격차 속에서 ‘밤낮으로 노력해도 아무런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박탈감에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의와 공정을 기치로 내걸었던 이재명 정부로서는 이번 사태로 인한 청년층의 지지율 이탈과 역풍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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