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선망과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의사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점차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최소한의 직업윤리마저 외면한 채 오로지 돈벌이만 일삼는 직업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피부과 전문의임에도 치료는 거부한 채 고가의 미용 시술에만 골몰하는 일부 의사들의 행태와 사치스러운 일상을 SNS에 공개하며 재력 과시에 여념이 없는 ‘자칭 의사 부인’의 등장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의료계 안팎에선 24시간 타인 생명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선량한 의료인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소수의 일탈 행위 근절을 위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돈 되는 미용 시술만 일삼는 병원 실태 꼬집은 예능 영상에 ‘공감’ ‘분노’ 반응 잇따라
얼마 전 한 OTT플랫폼에서 방영 중인 인기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한 장면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해당 장면이 담긴 영상은 피부과를 배경으로 환자와 의사가 실랑이를 벌이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 아토피 증상으로 피부과를 찾은 여성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 피부과 전문병원으로 가라”는 상담 실장의 안내를 듣고 분통을 터트린다. 뒤이어 등장한 의사는 “아토피는 진료 과목에 없다. 죄송하다”고 설명한다. 이 때 피부과 전문의가 등장해 해당 의사를 향해 “아토피는 전문의에겐 기본”이라며 “다음에 머리하러 오겠다”고 일침을 가한다.
해당 장면이 담긴 영상은 각종 SNS 플랫폼을 통해 빠르게 확산됐는데 영상에 달린 댓글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할 법한 일이 실제로도 비일비재하다며 ‘공감된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동시에 “저런 곳이 왜 피부과 간판을 달고 있나” “강남에 가면 저런 병원 수두룩하다” “피부과뿐만 아니라 안과, 정형외과 중에도 수술 외 환자 진료를 아예 안 받는 병원이 많다” “성형외과, 피부과 등 미용 병원들이 전체적으로 문제가 많다” “미용 진료를 정찰제로 바꿔야 한다” 등 심각한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내용들도 적지 않았다.
의료계, 국회 등에 따르면 환자의 건강이나 생명과 직결된 각종 질환 치료를 하지 않는 병원의 문제는 어제 오늘 일만의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질환·질병 치료는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에 치료비 또한 병원 마다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질환·질병과 동 떨어져 있어 건강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이른바 ‘비급여’ 치료는 병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사실상 부르는 게 값이다 보니 비급여 치료가 병원의 수익 창출에는 월등히 유리하다. 미용 목적의 치료나 시술, 수술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탓에 노골적으로 비급여 치료 환자만 골라 받는 병원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건강보험 진료를 단 한 건도 청구하지 않은 의원급 의료기관은 무려 1974곳에 달했다. 건강보험 미청구 의원급 기관은 2022년 1540곳, 2023년 1663곳, 2024년 1764곳, 2025년 1974곳 등으로 매 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건강보험 진료 미청구 의료기관은 대부분 미용 시술 위주의 병원인 것으로 분석됐다. 청구가 없는 의원의 95%는 성형외과(692곳)와 일반의 의원(1185곳) 등이었다. 대한피부과의사회에 따르면 국내 피부과 전문의는 2950명인데 피부 진료를 표방하는 동네 의원(일반의)은 3만여 곳에 달한다.
르데스크 취재 결과, 진료 과목에 ‘피부과’를 적어 놓고 아토피 등의 피부 질환을 하지 않는 병원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강남구, 서초구 소재 피부과(진료 과목 포함) 약 50여곳에 아토피 치료를 문의한 결과 12곳(24%)이 사실상의 진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최근의 논란을 의식한 듯 “지금 예약하면 5일 뒤에 치료 받을수 있다” “전문의가 아닌데 괜찮겠나” “아토피 진료는 따로 예약은 받지 않고 있어 내원해야 한다. 대신 내원하면 대기 시간이 길 수 있다” 등 간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칭’ 의사 아내 호화 일상에 부정 여론 확산…의료계 “선량한 의사들만 억울, 대책 필요”
최근 SNS를 중심으로 자신을 ‘의사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성의 호화로운 일상을 담은 콘텐츠 확산도 의사 직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름을 붓고 있다. 관련 영상은 인물은 다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영상 제목에는 어김없이 ‘의사 아내’ ‘평범한 일상’ 등의 단어가 적혀 있다. 또 한강이 보이는 고급 주택, 고급 레스토랑에서 브런치 등 고가의 메뉴 주문, 명품 구매, 성형외과·피부과 미용 시술 등의 장면이 등장한다. 영상 초반이나 마지막에 “능력자 남편 고마워”라는 자막이 적혀 있는 콘텐츠도 다수 존재한다.
문제는 해당 영상을 본 일반 대중들의 반응이다. “도대체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저런 생활이 가능하냐” “이래서 다들 의대가려고 하는구나” “의사하면 돈은 쓸어 담는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저게 다 환자들 돈이라니” “정말 저게 가능하면 세무조사 나가야 한다” 등 의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해당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장면, 자막 등의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 직업군에 부정적 낙인이 찍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의료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이 갈수록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소수의 일탈,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는 SNS 콘텐츠 등으로 인해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선량한 의료인조차 ‘도매금’ 취급을 받고 있다는 반응이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박서진 씨(남·33·가명)는 “사실 대다수의 의사들은 수술, 진료 등에 매진하느라 잠 잘 시간조차 없다”며 “가슴 속에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킨다는 사명감을 품고 있는데 몇몇 병원들의 일탈 때문에 직업 전체가 평가절하 되고 있어 억울할 따름이다”고 토로했다.
강원도 원주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 중인 한 전문의는 “강남에 위치한 몇몇 성형외과, 피부과, 치과 등을 제외하면 사실 대다수의 의사들의 수입은 일반 직장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수준이다”며 “몇몇 병원들의 과도한 돈벌이 행태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는데 실제 대부분의 의사들은 사회에 봉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환자의 질병이나 질환 치료에 매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료계의 우수한 인력 유입과 의료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라도 소수의 일탈 행위에 대한 차단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의료는 일반적인 업종과 달리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며 “일부 의료기관이 수익성이 높은 미용 분야에만 편중되는 현상은 질환 치료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의료 서비스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최근 SNS 등을 통해 비춰지는 일부의 화려한 일상이 의료계 전체의 모습으로 투영되면서 대중과의 괴리감을 키우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며 “대다수 의료인이 사명감을 갖고 현장을 지키고 있는 만큼 소수의 일탈로 인해 쌓인 오해를 풀고 의료계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료 본연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제도적 뒷받침과 사회적 소통이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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