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급증에 힘입어 올해 1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지만 노사 갈등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실적 호조를 계기로 노조가 영업이익의 15%에 달하는 대규모 성과급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CAPEX) 등 글로벌 경쟁력 전반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반도체 산업이 초호황 국면에 진입한 동시에 미국과 대만, 중국 기업들까지 대규모 투자 경쟁에 뛰어든 상황이라는 점에서 삼성전자 내부의 성과급 갈등은 기업 차원을 넘어 국내 반도체 산업 전체의 경쟁력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배당보다 많고 R&D보다 큰 성과급 요구…투자 재원 잠식 우려 확산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매출 133조원, 영업이익 57조2000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새로 썼다.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 증가율은 755%를 넘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D램 가격 상승, AI 서버 수요 확대 등 외부 업황 개선에 힘입은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노조는 연간 반도체 영업이익을 270조원 수준으로 가정해 회사 측에 40조5000억원 규모의 성과급 재원 마련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이 300조원 안팎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만큼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지급할 경우 그 규모는 45조원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지난해 삼성전자가 400만명 주주에게 지급한 배당금 약 11조1000억원의 4배 수준이며, 지난해 연구개발비 37조7000억원보다도 많은 규모다.
AI 반도체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현재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확보, 생산능력 확대, 첨단 패키징 역량 강화 등을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삼성전자가 노조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게 될 경우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은 물론 인수합병(M&A) 등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선택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IB업계에 따르면 40조~45조원 규모의 재원이면 유력 AI 설계기업이나 첨단 시스템 반도체 기업을 인수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사업부를 인수할 때 투입한 자금은 약 10조3000억원이었고, 삼성전자가 2016년 인수한 하만의 인수가는 약 9조원 수준이었다. 최근 삼성전자가 인수한 유럽 공조업체 플랙트그룹의 인수 규모도 2조4000억원 수준이다.
특히 현재 삼성전자는 실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투자를 줄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세미컨덕터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올해 주요 반도체 제조사의 설비투자 규모는 TSMC 81조원, 삼성전자 60조원, SK하이닉스 41조원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어 마이크론은 약 30조원, 인텔은 약 26조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마이크론과 인텔 역시 AI 메모리와 첨단 공정 대응을 위해 공격적인 투자 전략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만 내부 성과급 갈등에 직면한 점은 경쟁 구도 측면에서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삼성전자는 평택 4공장을 중심으로 HBM 생산 확대를 추진 중이고,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과 오스틴 공장 증설에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가 미국에만 투입하기로 한 금액은 약 389억달러(약 57조원)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관세 리스크와 공급망 안정화를 이유로 해외에 추가로 투입해야 할 투자 규모가 100조~120조원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AI 호황이 만든 착시…노사갈등 장기화 땐 경쟁사 격차 확대 우려
최근 반도체 업계 전반이 AI 수요 확대에 따라 이례적인 성장 구간에 진입해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매출은 7917억달러로 전년 대비 25.6% 증가했다. 올해는 연간 1조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가트너는 올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규모를 1조3000억달러로 제시하며 전년 대비 63%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문제는 이런 호황이 한국 기업만의 잔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만 TSMC는 비수기로 여겨지는 1분기에도 분기 기준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AI 서버용 웨이퍼 수요가 스마트폰 비수기를 상쇄했고, 2나노 공정은 주요 고객사들이 장기 물량을 선점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반도체 장비·소재 기업들 역시 동반 호황을 누리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에서 초기 진입에 성공하며 이미 실질적인 수익 창출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주 M15X와 P&T7, 용인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HBM 생산과 첨단 패키징 역량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 패키징 공장 설립까지 병행하며 공급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 기술 완성도를 끌어올리며 추격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시장 지배력 강화로 직결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선점 효과가 재무 성과로 연결되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아직 기술개선이 사업 성과로 완전히 안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삼성전자 입장에선 HBM 생산라인 확대, 첨단 패키징 강화, 평택 4공장 운영, 미국 생산거점 투자, 파운드리 수주 확대, 중국 추격 견제 등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하다. 여기에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관세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자금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노사 갈등이 주가와 투자심리에 미칠 악영향도 우려를 사는 대목이다. 해외에서는 노조 파업이 기업 가치에 직접 타격을 준 사례도 적지 않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2023년 전미자동차노조(UAW) 파업 이후 주가가 8% 이상 하락했고, 10월 초에는 3년 만의 최저 수준까지 밀렸다. 삼성전자도 2024년 7월 전삼노가 창사 이후 첫 무기한 총파업에 나섰지만 가시적 성과 없이 마무리된 전례가 있다. 그럼에도 다시 총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반도체 생산 차질로 5조~10조원 수준의 영업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성과 공유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기업의 현금 여력이 곧 기술 경쟁력으로 연결되는 시기”라며 “초격차 회복을 위해 집중 투자해야 할 시점에 과도한 성과급 요구가 반복되면 결국 미래 투자 재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조 요구안이 현실화될 경우 이는 단순한 보상 확대가 아니라 기업의 자금 배분 우선순위 자체를 흔드는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삼성전자가 맞닥뜨린 문제는 단순한 노사 협상이 아니라 AI 시대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기업 자원을 어디에 우선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며 “초호황이 영원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성과급 요구가 확대된다면, 호황이 꺾였을 때 그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의 투자 축소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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