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을 활용해 가방을 꾸미는 문화가 유행한 데 이어 최근에는 볼펜을 꾸미는 ‘볼꾸’와 키보드 캡을 꾸미는 ‘키꾸’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1만원도 채 들지 않는 비용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청년층은 물론 중장년층으로까지 확산되는 모습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동대문종합시장에는 파츠와 참 등 부자재를 직접 고르기 위해 찾는 방문객들이 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재료를 먼저 확보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시장을 찾는 이른바 ‘오픈런’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르데스크가 평일 오후 동대문종합시장 5층 부자재 상가를 방문한 결과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매장은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색색의 볼펜 몸통이 진열된 매대 앞에는 방학을 맞아 방문한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점심시간을 이용해 들른 인근 직장인, 40대 여성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방문객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손에 작은 쟁반을 들고 캐릭터 비즈, 컬러 참, 미니 피규어 등 각양각색의 부자재를 담아 비교하며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상인들 역시 계속해서 볼펜과 참을 꺼내놓고 있었다. 반복해서 조합을 바꿔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완성품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원하는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0~30분 정도였다.
상인 박현경 씨(가명)는 “하루에 몇 번 씩 볼펜이랑 꾸미기 재료들을 새로 깔고 있다”며 “평일에는 오후 6시 되면 인기 있는 색상은 소진되는 경우가 많고 주말의 경우에는 더 빨리 닳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박 씨는 “지금까지 유행했던 DIY 아이템 중에서도 키캡과 볼펜 꾸미기가 가장 반응이 좋다”며 “연령대가 넓고 가격 부담이 적다 보니 처음 해보는 손님들도 쉽게 도전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볼꾸’와 ‘키꾸’는 지난해 말부터 인스타그램 등 SNS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된 DIY 트렌드다. 몇 년 전 유행했던 키링을 활용한 가방 꾸미기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새로운 꾸미기 문화로 평가된다. 인스타그램에서 ‘#볼꾸’와 ‘#키꾸’ 해시태그는 각각 1000건 이상의 게시물이 등록돼 있으며, ‘#동대문종합시장’ 해시태그는 12만4000여 건에 달한다. 게시물에는 관련 부자재를 판매하는 매장 정보부터 자신이 직접 꾸민 볼펜과 키캡을 자랑하는 사진까지 다양하게 올라와 있다.
이 같은 트렌드의 핵심은 ‘가성비’다. 볼펜 몸통은 저렴한 곳에서는 500원, 비싸도 1000원 선에서 구매할 수 있다. 참이나 파츠 역시 개당 수백 원대로 펜 하나를 꾸미는 데 5000원도 들지 않는다. 키캡의 경우에도 4구 기준으로 LED 기능이 있는 제품은 6500원, 일반 키캡은 3500원 수준이다. 원하는 디자인으로 꾸며도 1만원 내외면 충분하다.
또한 기계식 키보드는 축 종류에 따라 타건음이 달라 직접 눌러보며 소리를 비교하는 방문객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처럼 비용 부담이 적다 보니 소비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나 색상, 취향에 맞춰 자유롭게 볼펜과 키캡을 꾸기며 개성을 표현하는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대학생 조연지 씨(21·여)는 “평소 아이패드와 노트북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펜을 일부러 사지는 않았다”며 “예전에는 필기감이나 리필 심이 중요한 고가의 펜을 선호했지만 요즘은 저렴하더라도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펜을 직접 꾸며 사용하는 게 더 즐겁다”고 말했다. 이어 조 씨는 “볼펜만 사려고 왔는데 키캡도 마음에 드는게 많아서 키캡도 하나 만들어보려고 고민하고 있다”며 “금액적으로 부담됐다면 구매하지 않을텐데 생각보다 훨씬 저렴해서 만들어봐도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방학을 맞이해 9살 딸과 함께 방문한 방이삭 씨(38·남)는 “아이가 평소에도 혼자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해 이런 곳에 자주 데리고 다닌다”며 “직접 고른 재료로 자신만의 볼펜을 완성해보는 과정이 재미있는지 오래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방 씨는 “방학이 워낙 길다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10개를 만들어도 5만원 정도 밖에 안 하니까 비교적 비용 부담도 적고 아이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은 선택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가격적인 부담이 적다 보니 다른 콘셉트로 다시 만들어보기 위해 재방문하는 손님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박해인 씨(23·여)는 “몇 주 전에 친구와 함께 방문했는데 이번에는 남자친구와 커플 키캡을 만들어 보고 싶어 다시 오게 됐다”며 “이곳에서는 취향에 맞게 다양한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고 실패해도 부담이 없어 여러 번 만들어보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볼꾸와 키꾸 열풍의 배경으로 ‘낮은 진입장벽’과 ‘즉각적인 만족감’을 꼽는다. 이미 완성된 제품을 구매하는 방식과 달리 직접 고르고 조합하는 과정에서 실패에 대한 부담은 적지만 완성 후 만족도는 높다는 것이다. 특히 일반적인 DIY가 긴 시간이나 전문 기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볼꾸와 키꾸는 별다른 기술 없이도 짧은 시간 안에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이 확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여러 번 시도할 수 있어 취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소비자들의 반복 방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경기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소액으로 즐길 수 있는 ‘작은 사치’형 소비가 강세를 보인다”며 “볼꾸와 키꾸 역시 부담 없는 가격대에서 취미와 자기표현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트렌드로 당분간 인기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