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관세’라는 고강도 통상 카드를 꺼내 들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행보에 제동이 걸릴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당장 관세 1단계 조치에서 직접적인 관세 부과 대상에서는 제외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범위의 추가 확대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시사한 만큼 안심하긴 이르다는 것이다.
관세 적용 여부와 별개로 글로벌 고객사의 비용 부담, 미국 내 투자 압박, 국내 산업 생태계에 미칠 파장까지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정치 외교적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단계 관세의 범위와 한계…직접 영향은 제한적이지만 韓반도체 불확실성 리스크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행정명령의 핵심은 미국으로 수입된 첨단 AI 반도체가 중국 등 제3국으로 재수출될 경우 25%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엔비디아의 H200, AMD의 MI325X 등 고성능 컴퓨팅 칩이 대표적이다. 다만 관세 적용 대상은 AI 연산용 고사양 칩으로 한정됐다. 미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국가 안보 차원의 조치임을 강조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가 일단 직접적인 타격을 피했다는 평가를 받는 배경에는 제품 구성과 수출 구조가 지목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공급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은 대부분 미국 내 AI 서버와 데이터센터에 사용된다. 이번 조치에서 미국 내 데이터센터용, 연구개발용, 소비자 가전용 반도체는 예외로 분류돼 관세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이 자국 내 메모리 생산만으로 AI 인프라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운 현실 역시 이러한 예외 적용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다만 업계에서는 ‘직접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온다. 관세로 인한 비용 부담이 공급망 전반으로 전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와 AMD가 관세 부담을 이유로 원가 절감 압박에 나설 경우 메모리 공급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단가 인하 요구에 직면할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AI 가속기 공급망에서 핵심 부품인 HBM을 공급하고 있다. HBM은 기술 장벽이 높고 공급사가 제한적인 제품이지만 동시에 고객사 의존도가 높은 구조라는 점에서 가격 협상력에서 한계가 있다. 관세가 직접 부과되지 않더라도 수익성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관세 확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백악관은 팩트시트를 통해 향후 반도체 및 파생 제품 전반으로 관세 범위를 넓힐 수 있음을 시사했다. 범용 메모리까지 관세 대상에 포함될 경우 단순한 비용 증가를 넘어 가격 경쟁력과 수요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메모리는 가격 민감도가 높은 산업인 만큼 관세는 곧바로 시장 점유율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이러한 불확실성을 인식하고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긴급 대책회의와 업계 간담회를 열고 미국 상무부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반도체가 국내 수출과 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관세 범위와 예외 규정은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통상 현안으로 다뤄지고 있다.
관세 협상부터 국내 투자 유인까지…반도체 생태계, 정부 역할론 대두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 관세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자의 사업 구조와 고객 관계를 반영한 대응 시나리오를 구체화하고 있다. 이번 조치가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향후 관세 확대나 조건부 면제 협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두 기업 모두 미국 내 생산·후공정 역량을 핵심 변수로 놓고 전략을 재점검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내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선택지가 넓다는 평가를 받는다.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파운드리 공장은 미국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강화 정책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는 첨단 패키징 라인을 미국 현지에 추가로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제조부터 패키징까지 전 공정을 미국에서 수행할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강조하는 ‘미국 내 기여도’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관세 면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메모리, 패키징을 모두 아우르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현지에 ‘완결형 생산 구조’를 구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관세 회피를 넘어, 미국 내 고객사와의 협력 관계를 장기적으로 안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대규모 자본 투자를 전제로 하는 만큼 투자 회수 기간과 수익성 관리가 향후 과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의 대응은 선택과 집중의 성격이 강하다. SK하이닉스는 파운드리 사업이 없는 만큼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력과 후공정 역량을 중심으로 미국 전략을 설계하고 있다. 인디애나주에 계획된 HBM 첨단 패키징 공장이 그 핵심이다. 이 공장은 HBM의 성능과 수율을 좌우하는 패키징 공정을 미국 현지에서 수행함으로써 최대 고객사인 엔비디아를 비롯한 AI 반도체 업체들과의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HBM은 단순한 메모리 제품이 아니라 고객 맞춤형 설계와 패키징 기술이 결합된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SK하이닉스가 미국 내 후공정 투자를 확대할 경우 관세 리스크를 낮추는 동시에 고객사의 공급망 안정성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두 기업 모두 미국 투자 확대가 국내 투자 축소로 직결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연구개발과 핵심 공정 역량은 국내에 유지하면서 미국에는 고객 대응과 정책 리스크 관리에 필요한 생산·후공정 기능을 배치하는 ‘전략적 분산’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관세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기업 전략뿐 아니라 정부 차원의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세 면제 협상을 위한 외교·통상 역량과 함께 국내 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규제 완화와 인프라 지원, 세제 혜택 등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 한미 통상 합의를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게 과제로 지목된다. 한국은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도체 분야에서 최혜국 대우를 받기로 합의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이 ‘조건부 거래’ 성격을 띠고 있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해당 합의를 근거로 관세 협상에서 분명한 기준선을 제시하고 한국 기업이 다른 국가 대비 불리한 조건을 적용받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또 통상 대응과 함께 국내 투자 환경을 유지·강화하기 위한 산업 정책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투자를 확대할수록 국내 반도체 클러스터와 협력사 생태계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단순한 투자 요청을 넘어 기업이 국내에 투자를 지속할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술 경쟁의 무대에 통상·정치 변수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기업의 성과는 제품 경쟁력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국면이 됐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번 1단계 조치에서 직접적인 관세 부담을 피했지만 향후 관세 확대 여부와 미국 투자 요구의 강도에 따라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직격타를 입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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