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 호수(Geneva Lake) 주변 주거 타운은 ‘전 세계 범죄자들의 도피처’로 불린다. 이곳엔 부정부패, 비리, 독재 등 각종 부정적 이슈로 세계 각국 언론 매체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렸던 유명인사들 소유 저택이 즐비하다. 유럽에서 유일한 중립국이자 비밀 유지 시스템이 갖춰진 스위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다. 일각에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꼽히는 스위스의 ‘추악한 이면’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푸틴 측근, 독재자 딸, 탈세의혹 영국 재벌 등 아름다운 호수를 둘러싼 ‘검은돈의 주인들’
제네바 호수 인근 저택 소유자 중 최근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바실리 아니시모프(Vasily Anisimov)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의 유도 파트너로 알려진 러시아 올리가르히(Oligarch)다. ‘올리가르히’는 러시아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부를 축적한 재벌 집단을 일컫는 단어다. 올리가르히 대다수는 경제적 영향력 외에 막강한 권력까지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아니시모프는 푸틴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러시아를 대표하는 보드카 제품 ‘푸틴카’ 판매권과 알루미늄·광산·부동산 업체 코랄코(Coalco)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포브스가 추정한 그의 자산 규모는 약 27억달러(약 3조8000억원)에 달했다. 그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크로아티아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푸틴으로부터 러시아 조국공로훈장을 받으면서 푸틴의 숨겨진 자금줄이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였다. 미국 국무부는 아니시모프를 ‘크렘린 리스트(친푸틴 올리가르히 명단)’에 포함시킨 상태다. 유럽 인권단체들도 연일 “아니시모프 재산 몰수”를 외치고 있다.
아니시모프는 지난 2013년 제네바 호수 인근 저택을 4000만프랑(약 600억원)에 매입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침공하기 1년 전이다. 저택 규모는 대지면적 약 4000㎡(약 1200평), 연면적 2400㎡(약 720평) 등이다. 건물 내부는 침실 20개, 화장실 15개로 구성돼 있다. 백악관을 연상시키는 외관과 넓은 마당, 저택에서 떨어져 있는 게스트 하우스 등이 특징이다. 스위스 현지 부동산 시장에서 평가한 해당 저택의 현재 가치는 약 8000만프랑(약 1400억원)에 달했다.
또 다른 러시아 올리가르히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Dmitry Rybolovlev)도 제네바 호수 인근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한 때 러시아 비료업계 거물로 불리며 러시아 재계 순위 10위 기업을 이끌었던 라볼로블레프의 재산 규모는 약 67억달러(약 9조4500억원)로 알려졌다. 그는 러시아 대표 비료기업 우랄칼리(UralKali) 지분 53%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2010년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당시 매각가는 53억달러(약 7조4700억원)였다. 리볼로블레프는 푸틴 정권 3기 시절(2012년~2017년)인 2015년 러시아 내에 있는 나머지 자산 대부분을 정리하고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당시 러시아 내부에선 푸틴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 아니냐는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스위스로 이주한 그는 약 1200만프랑(약 220억원)을 들여 레이크 호수 인근에 6100㎡(약 1830평) 규모의 부지를 매입했고 이후 연면적 1500㎡(약 400평) 규모의 저택을 건설했다. 무려 7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22년 완공된 저택은 두 개 건물이 연결된 독특한 외형을 띄고 있다. 현지에선 ‘빌라 프레 랑가르드(Villa Pré-Langard)’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한 쪽의 건물엔 침실과 욕실이 각각 10개씩 갖춰져 있으며 다른 쪽 건물엔 사무 공간 위주로 구성돼 있다. 해당 저택의 가치는 약 2000만프랑(약 350억원)으로 추산됐다.
리볼로블레프의 삶은 스위스 이주한 이후에도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는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 및 모나코 게이트 등 비리 의혹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은 파나마의 전 세계 정치인과 부유층이 조세 회피와 자금 은닉을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한 사실이 담긴 금융문서가 한 로펌에서 유출돼 공개된 사건이다. ‘모나코 게이트’는 리볼로블레프가 모나코 사법부 및 경찰 고위 관계자들을 매수해 부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카자흐스탄 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Nazarbayev)의 딸 디나라 쿨리바예바(Dinara Kulibayeva)도 제네바 호수 주변에 저택을 보유하고 있다. 나자르바예프는 1990년부터 2019년까지 29년 동안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지낸 독재자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 대통령 직을 내려 놓은 후에도 보안위원회 의장 및 여당 대표를 역임하며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막대한 자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비자금을 조성했단 의혹을 꾸준히 받아왔다. 딸인 쿨리바예바 소유 저택의 매입 자금 출처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쿨리바예바는 지난 2009년 약 7470만프랑(약 1315억원)에 제네바 호수와 인접해 있는 저택 한 채를 매입했다. 규모는 대지면적 2700㎡(약 800평), 연면적 1600㎡(약 480평)이다. 저택 내부는 침실 8개, 화장실 8개로 구성돼 있다. 해당 저택의 현재 가치 약 1억프랑(약 1750억원)으로 평가됐다. 쿨리바예바는 스위스에서 10년 이상을 거주해 시민권까지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자흐스탄 현지에선 스위스를 두고 ‘무책임한 중립’이라는 비판 여론이 무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도계 영국 재벌 힌두자(Hindujas)가문의 일원인 프라카쉬 힌두자(Prakash Hindujas)도 제네바 호수 인근 한 저택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2008년 약 6000만프랑(약 1000억원)을 주고 대지면적 3500㎡(약 1060평), 연면적 2000㎡(약 600평) 규모의 저택을 매입했다. 저택 내부는 침실 12개, 화장실 10개로 구성돼 있다. 현재 가치 약 1억프랑(약 1700억원)으로 알려졌다. 힌두자 가문이 이끄는 힌두자그룹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자동차, 석유, 금융, IT, 인프라 등 다양한 산업을 영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 탈세 및 조세 회피 의혹에 휩싸인 바 있다. 힌두자 가문의 재산 규모는 370억파운드(약 65조원)로 알려졌다.
스위스 태생인 발터 프레이(Walter Frey)는 제네바 호수 인근 거주민 중 몇명 되지 않는 부정적 이슈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유럽 최대 자동차 딜러 그룹이자 스위스 자동차 시장의 절대 강자로 불리는 에밀프레이그룹(Emil Frey Group) 회장이다. 개인 재산 규모는 약 37억7000만달러(약 5조4000억원)로 알려졌다. 그는 2010년 약 5000만프랑(약 850억원)에 제네바 호수 인근 저택을 매입했다. 저택은 대지면적 3000㎡(약 900평), 연면적 1800㎡(약 550평) 등의 규모로 내부는 침실 10개, 화장실 8개로 구성돼 있다. 현재 저택의 가치는 약 8000만프랑(약 1400억원)로 추산됐다.
송환도 까다롭고 은행도 철통보안…돈·권력 가진 전 세계 범죄자들의 도피처
제네바 호수 인근에는 꼴로니(Cologny), 콜롱 벨리(Collex Bossy), 베르수아(Versoix), 벨르뷰(Bellevue), 까삐뜨(Capite) 등의 고급 주거 타운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주거 타운 거주민은 약 4만2000명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인 만큼 쾌적한 주거 환경이 특징이다. 덕분에 유럽, 중동, 미국, 아시아 등 세계 각국의 부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재벌·정치인들이 제네바 호수 주변을 선택한 것은 자연경관 보다 더욱 큰 이유가 있다. 바로 범죄인 송환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다고 까다롭다는 점이다. 스위스 정부는 다른 나라 정부가 정치적 사건이나 경제 범죄 혐의가 얽혀 있는 자국 범죄자를 송환하려해도 스위스 법원의 판결을 받도록 하고 있다. 대법원까지 소송이 이어지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또 1934년 제정된 스위스 은행 비밀법(Banking Secrecy Law)에 따르면 고객 계좌 정보는 국가기관이라도 강제 접근이 불가능하다. 해당 법을 근거로 스위스 은행은 절대로 고객의 금융 거래 내역 및 자산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법을 어길 경우엔 형사처벌도 받는다. 일례로 스위스의 한 은행원은 파쇄된 고객 거래정보 몇 조각을 외부에 유출했단 이유로 징역형에 처해진 바 있다. 2009년 이후 OECD와 G20의 압박으로 ‘탈세 목적의 비밀 계좌’는 점차 제한되고 있지만 범죄 수사나 정치적 압력에 의해 계좌가 공개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결국 스위스는 죄를 짓고도 돈만 있다면 송환 소송을 최대한 끌면서 남은 인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를 방증하듯 외국인 비율이 높은 제네바 호수 인근 주민들의 연평균 소득은 스위스 평균(1억80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약 2억5000만원 수준에 달했다. 주택 평균 가격도 무려 60억원이나 됐다. 스위스 평균(약 18억원) 보다 3배 이상 높은 금액이다.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한 변호사는 “스위스는 아무리 중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송환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스위스 내 변호사·은행가·의사·공증인 등 전문직들의 권한이 강력한 이유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위스는 오랜 기간 글로벌 범죄자들의 도피처로 활용돼 왔고 그 중 제네바 호수 주변에는 돈과 권력을 가진 수많은 범죄자들이 몰렸다”며 “천혜의 자연 경관 이면에 감춰진 부끄러운 민낯이라고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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