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방적인 관세인상 조치로 세계 각국에서 반(反)트럼프 여론의 확산되면서 메릴랜드의 고급 주거지 ‘셰비 체이스’(Chevy Chase)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대통령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 다수 모여 있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필두로 한 워싱턴D.C.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 세력으로 평가되고 있어서다. 실제로 ‘셰비 체이스’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성향이 뚜렷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인 정치·재계·언론 엘리트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다.
경제·사법·언론 등 ‘반(反)트럼프’ 엘리트 다수 거주…워싱턴D.C. 세력 유일 대항마 부상
미국 통화정책의 최종 결정자인 제롬 파월(Jerome Powell)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셰비 체이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연준 의장은 기준금리 등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요직 중에 요직이다. 대통령이라 해도 연준의 독립성을 침해할 수 없고 미국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한다는 점을 이유로 ‘글로벌 경제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파월 의장은 2012년 연준 이사회에 합류했고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으로 의장에 올랐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2기 들어 금리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이 금리 인하 요구에 응하지 않자 “멍청이” “미국 경제의 적” 등의 원색적인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파월 의장은 “기준금리 인하는 정치적 요구 때문이 아닌 연준의 독립적 판단에 의해 결정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파월 의장은 연준 이사로 임명된 2013년 약 400만달러(약 55억원)를 들여 ‘셰비 체이스’에 위치한 저택 한 채를 매입했다. 해당 저택은 대지면적 약 3040㎡(약 910평), 연면적 약 440㎡(약 135평) 규모다. 내부는 침실 6개, 욕실 5개 등의 구조로 돼 있다. 와인셀러·대형 서재·정원 수영장 등도 갖춰져 있다. 저택 외관은 미국 동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주의 양식을 띄고 있다. 현지 카운티에서 평가한 현재 저택 시세는 약 810만달러(약 110억원)다.
미국 사법부 정점에 있는 존 로버츠(John Roberts) 연방대법원장도 ‘셰비 체이스’에 둥지를 트고 있다. 연방대법원장은 종신직이라 일각에서는 대통령보다 미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는 받는 자리다.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전 미국 대통령 시절 임명된 보수 성향 인물이지만 트럼프 대통령과는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로버츠 연방대법원장 역시 파월 의장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대법원의 독립성을 최우선시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서다.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오바마의 판사도 트럼프의 판사도 없다. 오직 독립된 사법부만 있을 뿐이다”며 트럼프 행정부와 선을 그은 바 있다. 앞서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천적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의 최대 정치적 치적인 ‘오바마 케어(의료개혁)’ 정부 보조금 지급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로버츠는 진정한 보수가 아니다”며 불편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지난 2006년 170만달러(약 24억원)를 주고 ‘셰비 체이스’ 저택을 매입했다. 저택은 대지면적 약 1900㎡(약 570평), 연면적 약 390㎡(약 117평) 규모로 건물 내부는 침실 5개, 욕실 4개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해당 저택은 ‘셰비 체이스’ 내에서도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명문 사립학교가 지척에 자리하고 있어 치안 수준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운티가 평가한 저택의 현재 가치는 약 400만달러(약 55억원)로 추산됐다.
미국 유명 언론인이자 정치 평론가 크리스 매튜스(Chris Matthews)도 ‘셰비 체이스’에 거주하고 있다. 매튜스는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부터 트럼프 대통령을 집요하게 공격해 온 대표적인 반(反)트럼프 언론인이다. 매튜스는 1999년 200만달러(약 28억원)를 들여 ‘셰비 체이스’ 저택을 매입했다. 저택 규모는 대지면적 2100㎡(약 620평), 연면적 480㎡(약 150평) 등이이다. 내부는 침실 7개, 욕실 6개로 구성돼 있으며 현재 저택 가치는 500만달러(약 68억원)까지 상승했다.
워싱턴D.C.의 부동산 재벌이자 레너(Lerner) 가문 상속자 애넷(Annette) 레너도 ‘셰비 체이스’ 주민이다. 부동산 투자회사 레너 엔터프라이즈(Lerner Enterprise) 오너 일가 중 한 명인 레너는 MLB 구단 워싱턴 내셔널스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지니고 있다. 포브스가 추정한 레너의 자산 규모는 약 60억달러(약 8조3000억원)다. 레너는 2011년 700만달러(약 96억원)를 들여 ‘셰비 체이스’ 저택을 매입했다. 저택은 대지면적 약 4800㎡(약 1450평), 연면적은 980㎡(약 295평) 등의 규모다. 현재 가치는 약 1500만달러(약 206억원)로 추산됐다.
레너와 트럼프 대통령 간 직접적인 마찰은 없지만 그의 가문은 오래전부터 민주당을 후원해왔다. 트럼프 입장에선 적대 세력인 셈이다. 레너 또한 지난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약 8만달러(약 1억1000만원)를 후원했다. 해리스 외에도 민주당 주요 정치인들에게 꾸준히 정치자금을 후원하고 있다. 미국 정치권에선 ‘돈이 최대의 무기’라는 말이 정설처럼 여겨지는 만큼 레너와 레너 가문은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의 가장 까다로운 적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크리스 밴 홀런(Chris Van Hollen) 메릴랜드 민주당 상원의원도 ‘셰비 체이스’에 거주하는 반(反)트럼프 인사 중 한 명이다. 민주당 중진의원인 홀런은 워싱턴D.C.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반(反)트럼프 인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홀런은 지난 2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언급하며 “동맹국을 배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도 “관심을 끌고 싶은 사람”이라며 홀런을 조롱했다.
홀런은 1990년 100만달러(약 13억원)를 들여 ‘셰비 체이스’에 저택을 마련했다. 대지면적 920㎡(약 280평), 연면적 약 400㎡(약 120평) 규모의 저택 내부는 침실 4개, 욕실 3개로 구성돼 있다. 저택은 ‘셰비 체이스’ 내에서도 주로 중산층이 몰려 사는 곳에 위치해 있다. 지역 사회와의 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알려졌다. 해당 저택의 현 가치는 약 180만달러(약 24억8000만원) 수준으로 추산됐다.
평균소득·학력수준 월등히 높은 전통적인 민주당 강세 지역, 트럼프 지지율 고작 20%
‘셰비 체이스’가 속한 메릴랜드주는 민주당 강세가 뚜렷한 지역이다. 지난 대선에서 후보 별 득표율은 해리스 62.62%, 트럼프 34.08% 등이었다. ‘셰비 체이스’는 인구 약 2만명, 약 8000가구 규모의 소도시이지만 메릴랜드주의 민주당 지지를 선도하는 지역으로 꼽힌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해리스 후보의 득표율은 주 전체 득표율 보다 높은 74.1%에 달했다. 반면 트럼프 득표율은 21.69%에 불과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지역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대선 기간 “메릴랜드는 나를 싫어하는 주 중 하나다”고 언급했다. 또 메릴랜드주의 대표 도시인 볼티모어에 대해 “누구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쥐가 들끓는 곳이다”는 비하 발언을 쏟아내 지역 사회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셰비 체이스’엔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대법원 등이 몰려 있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으로 출·퇴근 하는 주민들이 유독 많이 거주하는 편이다. 자동차로 15분 불과 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주민 대부분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엘리트들인 만큼 가구 당 연평균 소득은 미국 평균(8만달러·약 1억1000만원)의 3배 수준인 약 21만3000달러(약 2억9000만원)에 달한다. 평균 주택 가격 역시 200만달러(약 27억원)로 미국 평균 보다 월등히 높다. 주민 대학 졸업률 역시 85%로 수준이다.
‘셰비 체이스’ 낮은 범죄율과 세금 덕분에 주민들의 거주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미국 통계사이트 USA팩트에 따르면 셰비 체이스의 인구 10만명 당 살인 사건 발생 건수는 6.1건에 불과하다. 무려 1006건에 달하는 워싱턴D.C.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수준이다. 소득세율도 최대 3.2%에 불과하다. 반면 워싱턴D.C.는 최소세율이 4%다. 해당 지역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셰비 체이스’는 오래전부터 워싱턴D.C. 엘리트들의 베드타운으로 명성을 떨쳐왔다”며 “특히 반(反)트럼프 인사들이 많이 거주하는 편인데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엘리트 민심과 동떨어져 있음을 방증하는 대표적 사례다”고 강조했다.
댓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