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가전업체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장에서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시장에서 가전 점유율을 지키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K-가전의 예상 밖 행보에 미국 현지 기업들은 국내 업체들을 겨냥한 여론전까지 불사하고 있다.
16일 가전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트럼프발 관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판매 가격을 고수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6월 23일부터 미국에 수입되는 가전제품 중 철강과 알루미늄이 포함된 제품에 대해 50%의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가전제품 원재료가 철강과 알루미늄이란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모든 가전제품에 관세를 부과한 것과 다름없다.
가격 추적 사이트 ‘키파(Keepa)’에 따르면 국내 가전업체들은 관세 시행 3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가격을 관세 이전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다. 제품에 부과되는 관세가 올라가면 가격도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기존 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기업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뿐이다.
세부적으로 삼성전자 냉장고(모델명·RF28R7201SR)는 관세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가격인 1599달러(약 270만원)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 세탁기(WA54CG)와 식기세척기(DW80B6060) 또한 각각 678달러(약 93만원), 998달러(약 138만원)로 가격 변동이 없었다. LG전자 역시 관세전 가격을 유지했다. 오히려 일부 제품의 경우 가격을 인하하기도 했다. LG 냉장고(LMXS28626S)는 올해 1월 기준 2500달러(약 345만원)였으나 9월에는 1774달러(약 245만원)까지 떨어졌다. 여기에 월별 할인 프로모션까지 이어가며 점유율 방어에 나서고 있다.
반면 일본과 중국 기업 제품들은 관세 여파로 가격이 상승했다. 일본 샤프의 식기세척기(SPW6757ES)는 600달러(약 82만원)에서 700달러(약 96만원)로 올랐고, 도시바 전자레인지(EML131A5C-BS)는 120달러(약 16만원)에서 155달러(약 21만원)로 상승했다. 중국 하이센스의 소형 냉장고(B551d167-337c)는 380달러(약 52만원)에서 420달러(약 58만원)로, 마이디어(Midea) 세탁기(MLH25N7BWW)는 840달러(약 115만원)에서 950달러(약 131만원)로 각각 인상됐다.
결국 관세 이후에도 가격을 유지한 것은 한국 기업뿐이다. 업계는 이 같은 전략을 ‘점유율 사수’ 차원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미국 가전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20.9%, LG전자가 18.8%로 각각 1, 2위를 기록했다. 만약 관세 부담분을 가격에 반영해 10~20% 인상했다면, 경쟁력 약화로 GE·윌풀 등 미국 기업에 선두 자리를 내줄 가능성이 있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현재 K-가전 인기는 미국에서 최고조에 달해 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며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지면 윌풀이나 GE 등 미국 업체들에 역전당할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시장 점유율 3위는 GE(15.5%), 4위는 윌풀(15.3%)이다. 두 기업은 최근 K-가전에 밀리며 매출이 감소하고 있다. 윌풀은 지난해 매출이 194억5000만달러(약 27조원)에서 166억달러(약 23조원)로 14% 줄었고, GE 역시 141억달러(약 19조5000억원)에서 123억달러(약 17조원)로 12.8% 감소했다. 미국 업체들은 트럼프 관세에 기대를 걸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K-가전이 가격을 유지하자 최근에는 여론전에 돌입했다. 윌풀은 삼성·LG가 미국 수출 과정에서 세관 신고가를 축소해 관세를 회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800달러 세탁기를 70달러로 축소 신고해 관세 부담을 줄였다는 설명이다. 윌풀 측 법률자문 다니엘 캘훈(록크리크트레이드 파트너스)은 “현 행정부는 어떠한 관세 회피 시도라도 신속하고 단호히 제재해 시장에 경고 메시지를 줄 것이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K-가전의 ‘가격 방어’ 전략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은 가격 인상에 민감하기 때문에, 현재 가격 유지 전략은 브랜드 인식 관리 차원에서도 효과적이다”며 “다만 관세로 인한 손실을 장기간 감내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들은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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