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장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들의 앞으로의 행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미국 대선의 판세 예측 오류로 역풍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특히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국내 주력 수출품에 영향을 미칠만한 공약들이 여럿 등장한 탓에 우려감은 더욱 크다. 다행히 대비책이 아예 없진 않지만 ‘골든타임’이 이미 지났다는 점에서 한동안은 분주한 행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언론예측·여론조사 결과 뒤엎은 미국 대선 결과, 국내 기업들도 ‘발등에 불’
미국은 로비 활동을 법적으로 허용해 주는 국가다. 다만 선거에 한해서는 후보에게 직접적으로 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 보니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는 단체를 활용한다. ‘슈퍼팩’이라 불리는 ‘정치활동위원회(PAC)’가 그들이다.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선거 운동 단체가 주최하는 모금 행사에 참여하는 식으로 간접 로비 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미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재벌기업 중 대선이 치러진 올해 가장 활발한 로비활동을 벌인 기업은 삼성그룹이다. 올해 3분기까지 총 630만달러(약 88억원)를 사용했다. 아직 4분기가 남았음에도 직전 대선이 치러진 2020년(271만달러)에 비해 2배가 넘는 돈을 썼다. 로비스트 수 역시 62명으로 직전 대선 28명 대비 34명이나 늘렸다.
삼성그룹은 대선 후보들에 대한 후원도 참여했는데 주로 베팅한 대상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었다. 삼성그룹이 해리스 측에 후원한 금액은 5만3065달러(약 7400만원)였다. 반면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후원한 금액은 8903달러(약 1200만원)에 불과했다. 정당 후원금 비중도 민주당 55.54%, 공화당 43.22%, 기타 1.24% 등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 3분기까지 총 241만달러(약 33억7000만원)를 로비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들 기업 또한 대선 후보 후원에 나섰는데 비중은 후보와 정당 모두 민주당 쪽이 높은 편이었다. 현대차는 해리스 후보에게 3817달러(약 537만원)를 후원한 반면 트럼프 후보에겐 고작 63달러(악 9만원)밖에 후원하지 않았다. 정당별 후원 비중도 민주당 87.83%, 공화당에 12.17% 등이었다. 기아도 해리스 5754달러(약 810만원), 트럼프 209달러(약 29만원) 등을 각각 후원했다. 정당 후원 비중 역시 민주당 69.9%, 공화당 17.4% 등이었다.
LG그룹은 올해 총 43만 달러(약 5억9000만원)를 로비자금으로 썼다. 대선 후보 후원은 해리스 쪽에만 진행했다. 총 957달러(약 134만원)를 썼다. 정당별 후원 비중 역시 민주당 93.7%, 기타 6.3% 등이었다. 사실상 민주당과 해리스에 ‘올인’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SK그룹 계열사 SK아메리카스는 올해 3분기까지 총 423만 달러(약 59억원)를 로비에 사용했다. 대선 후보를 대상으로 직접적인 로비자금을 투입하진 않았지만 소속 정당별 의원 후원 비중은 민주당 소속이 83.9%에 달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혹시 모를 변수도 미리 계산한 ‘관록의 4대그룹’
현재 미국은 대선뿐만 아니라 상원의원(Senate)·하원의원(House) 선거도 진행 중이다. 미국의 입법부는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 양쪽 모두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선거 이후에도 판세는 비슷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연방대법원도 보수 성향 대법관이 9명 중 6명에 달한다. 사실상 행정·입법·사법 모두가 공화당 또는 보수 일변도의 상황인 것이다. 앞으로 수년간 미국은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이 득세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동안 민주당과 해리스 후보에 베팅한 국내 기업 입장에선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그동안 구축해 놓은 미국 정계와의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경우 오랜 기간 엄청난 로비 금액을 투자한 만큼 미국 정계와의 네트워크도 탄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중에는 공화당 계열 인사도 포함돼 있다.
앞서 삼성그룹은 마이클 맥카울(McCaul, Michael) 미 하원 외교위원장, 마코 루비오(Marco Rubio) 상원의원, 케이 그레인저(Kay Granger) 등 공화당 주요 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를 진행한 바 있다. 루비오 상원의원은 차기 대권 후보로까지 언급될 정도로 공화당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지닌 정치인이다. 그레인저 하원의원은 무려 14선에 성공한 공화당 원로 의원이다. 이 외에도 삼성그룹은 연방의원 선거에서 11선에 성공한 존 카터 공화당 의원 등에 적극적으로 로비하기도 했다.
현대차의 경우 로비스트 계약으로 ‘트럼프 당선’이라는 변수에 대응해 놓은 상태다. 현대차가 선택한 인물은 워싱턴의 베테랑 로비스트인 데이비드 타마시(David Tamasi)다. 워싱턴 정가에서 그는 대표적인 친 트럼프 로비스트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과거 2016 대선 때 트럼프 빅토리 후원팩을 운영했고 이번에도 1만5000달러를 트럼프 캠프에 후원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 당선 이후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은 로비스트 중 한명이다.
현대차는 공화당 원로인 짐 인호페 상원 보좌관 출신인 에이트린 잭슨(Adrienn K. Jackson), 존 버라소 공화당 상원 입법 보좌관 경력의 마른 마로타(Marne Marotta) 등 공화당에 전통한 로비스트들 수십 명과도 이미 계약을 마쳤다. 반면 ‘친 민주당’ 로비 기업인 DLA파이퍼와는 지난해 계약 종료 후 더 이상 계약을 이어가지 않았다.
SK그룹은 올해부터 로비스트 회사와 계약하는 방식과 더불어 미국 현지 법인인 SK아메리카가 직접 로비스트를 채용하는 방식까지 전개하고 있다. SK아메리카 로비스트 명단엔 조지 부시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에서 일했던 인사, 상·하원 보좌진 출신 등이 포진해 있다.
LG그룹도 나름의 보험은 들어 놓은 상태다. 지난해 계약한 잭 루디실(Zach Rudisill)은 미국 내에서 대표적인 친 공화당계 로비스트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는 롭 포트먼(Rob Portman) 상원의원과 데이브 라이커스(Dave Reichert) 하원의원 측근으로 오랫동안 공화당을 위해 일했다. 또 그가 소속된 아킨 검프(Akin, Gump) 역시 워싱턴에서 공화당 네트워크가 탄탄하기로 유명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는 매우 계산적인 인물이라 해리스에 배팅한 기업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며 “그러나 사업가 출신인 만큼 본인의 이해득실을 철저하게 따져 본인에게 이득이 된다면 언제든 적을 동지로 받아들이는 성향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대선 판세 예측에는 실패한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분주하게 움직인다면 충분히 관계를 반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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