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행복, 가슴은 황홀했다”…만원 한 장으로 쓰는 ‘가을의 전설’
“머리는 행복, 가슴은 황홀했다”…만원 한 장으로 쓰는 ‘가을의 전설’

“집에만 있기엔 아까운 날씨.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주머니는 가볍고,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낮 기온이 20도 안팎을 오가는 날씨 덕분에 청명한 가을 분위기가 더욱 풍성해지는 요즘이다. 전국 각지의 명소들은 남녀노소, 주말·평일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순간의 즐거움도 잠시,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마냥 편하지 만은 않다. 쾌적한 날씨와 눈을 즐겁게 하는 황홀경에 빠져 기분을 내다보니 어느새 지갑이 홀쭉해진 탓이다. 이럴 때면 누구나 ‘집을 나설 때 이상으로 귀가 길도 즐겁고 뿌듯했으면’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단 돈 만원으로 즐기는 가을 나들이 과연 불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의외로 쉽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눈에게 주는 선물 같은 공간 ‘서울시민도서관’ 변화·멈춤 공존하는 모순의 예술작품 ‘덕수궁’

 

만원으로 즐기는 가을 나들이 첫 번째 코스는 서울시청 앞 서울시민도서관이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되며 월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다. 이용은 무료로 가능하다. 독서와 서울의 풍경을 동시에 즐기려는 이들에겐 최고의 공간이다. 1926년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부 청사였던 이곳은 2012년 도서관으로 탈바꿈해 시민의 품에 돌아왔다. 최근 숏폼 콘텐츠에 지친 MZ세대 사이에서 ‘독파민(독서+도파민)’ 열풍이 불고 있어 트렌드와도 상당히 부합하는 공간이다. 지난해 문체부의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20대 독서율은 74.5%로 성인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 서울시민도서관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사진은 일반자료실2 입구 앞 한강 작가 특별전시. ©르데스크

 

서울시민도서관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볼거리가 책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서관 옥상에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있는 서울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책을 보면서 쌓인 눈의 피로를 풀기에 안성맞춤이다. 한 쪽은 한껏 위용을 뽐내는 을지로의 빌딩숲이, 다른 쪽은 서울광장과 광화문, 그리고 청와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살짝 고개를 돌리면 넒은 서울광장과 고즈넉한 풍경을 자랑하는 덕수궁도 볼 수 있다. 특히 요즘 같은 가을철 덕수궁 주변은 ‘가을 정취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장관이 펼쳐져 있다.

 

잠깐 동안 덕수궁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 정취에 몸을 맡겨보고 싶은 유혹을 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홀린 듯이 덕수궁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덕수궁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된다. 덕수궁 입장은 성인 기본요금 1000원이며 ▲만 24세 이하 ▲만 65세 이상 ▲한복 착용자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매일 진행하는 무료 문화해설은 대한제국의 역사를 가진 덕수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세한 정보는 국가유산청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해설이 가미된 덕수궁 감상은 또 다른 재미를 자아낸다. 중화문에서 궁궐의 중심 건물인 중화전으로 이어지는 세 갈래 길 중 가운데 솟은 길은 ‘어도(御道)’다. 임금만이 다닐 수 있었던 이 길은 일반인이 통행할 경우 태형 80대에 처해졌다고 한다. 어도를 지나 중화전으로 향하는 ‘답도(踏道)’에는 다른 궁궐과 달리 특별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답도는 임금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계단이다. 경복궁을 비롯한 다른 궁궐 답도에는 봉황 문양을 새겨져있지만 중화전 답도에는 대한제국 황제의 위상을 상징하는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지어졌다. 주요 국가의식이 거행되던 정전은 황제의 색을 상징하는 황색 창호를 사용해 대한제국의 위엄을 보여준다. 현재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은 보존처리 중이다. ‘석조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이자 마지막 서양식 황실 건물이다. 지붕에는 조선 이씨 가문을 상징하는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웅장한 석조전 옆 콘크리트 건물은 1938년 일제에 건립된 이왕가 미술관 건물이다. 이왕가는 일본이 이씨왕조를 낮잡아 부르던 명칭이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거듭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 중화문에서 중화전까지 세갈래 길 중 가운데 솟아나있는 길은 임금이 다닌다고 해서 ‘어도’다. 사진은 덕수궁의 중화전 전경. ©르데스크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완전히 훼손됐다. 지난해 9월 복원된 ‘돈덕전’은 대한제국 시기의 서양식 외교 건물이다. 돈덕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형은 1층 엘리베이터 앞 유리 바닥 아래의 지하 보일러실이다. 돈덕전의 외부는 사진 고증을 통해 복원됐고 내부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미디어아트 전시실과 휴게실로 활용중이다. 전통 양식과 서양식 디자인이 공존하는 공간은 덕수궁 전체의 이미지와 꽤 흡사하다. 시시각각 변했던 한국 근대사의 흔적, 사시사철 변하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은 덕수궁은 ‘변화와 멈춤이 공존하는 모순의 예술작품’이라 불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도심 속에 펼쳐진 맛집 백화점 ‘을지로3가’ 지하철역이 품은 특별한 재미 ‘오!재미동’

 

나들이의 재미를 200% 즐기기 위해선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 다행히 덕수궁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엔 싸고 저렴하면서도 맛까지 훌륭한 ‘맛집 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을지로3가역 주변이다. 이곳에는 ▲한식으로 유명한 ‘H식당’ ▲바삭한 돈가스가 일품인 ‘A식당’ ▲쌀쌀한 날씨에 이국적인 향의 뜨끈한 국물을 즐길 수 있는 ‘O식당’ ▲낭만 가득한 스탠딩 바에서 타코를 즐길 수 있는 ‘A타코’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가벼운 주머니 사정이 걱정이라면 ‘A타코’에서 간단한 한 끼가 제격이다.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을지로 3가역 8번 출구로 나오면 독특한 네온사인 간판과 함께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데 바로 그곳이다. 낮 12시에 손님을 맞이해 9시에 문을 닫는 이곳은 타코 전문 멕시칸 스탠딩바를 표방하고 있다. 대표 메뉴는 타코라이스(7900원)로 부드러운 밥 위에 매콤한 멕시칸 소스, 신선한 야채, 바삭한 토르티야 칩이 올려져 있다. 저녁 시간대에는 맥주 한 캔과 함께 하는 스탠딩 다이닝을 즐기려는 젊은 손님들로 더욱 북적인다.

 

▲ 충무로 역사 지하 1층에 위치한 오!재미동. ©르데스크

 

마지막 목적지 역시 을지로3가에서 교통비 부담 없이 이동 가능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충무로역 지하 1층에 위치한 ‘오!재미동’이다. 서울영상위원회가 운영하는 이곳은 지하철역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 지하철 게이트 앞 호출 버튼을 누르고 ‘오!재미동 방문’을 알리면 입장 가능하다. 입장료는 무료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하며 일요일을 포함한 모든 공휴일은 휴무다.

 

오!재미동은 ▲극장 ▲갤러리 ▲도서·DVD아카이브 등 다양한 문화시설로 구성돼 있다. 극장에서는 예술·단편영화를 중심으로 한 정기·특별 상영회가 열리며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이 가능하다. 갤러리는 매년 1~2회 공모를 통해 신진작가들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 현재는 작가 김리아의 전시가 진행 중으로 한국 신화 속 ‘서천꽃밭’에서 영감을 받아 3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오!재미동을 ‘중간계’로 재해석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대표작인 ‘오색꽃밭에 건너가면’은 높이 2.75m, 폭 3.8m 규모의 대형 설치미술로, 오색 꽃이 뿌려진 투명막을 통해 독특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아카이브에는 영상문화 도서 200여권과 함께 국내·외 장·단편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영화인이 추천하는 DVD 컬렉션 등 5200여편의 DVD가 구비돼 있다. 영상문화 도서와 DVD는 내부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나 외부 반출은 불가하다. 대신 DVD 감상실을 이용할 수 있다. DVD 감상실은 간단한 회원가입 후 이용할 수 있으며 반투명 유리칸막이로 구획된 개별 감상 공간과 헤드폰을 제공한다. 이 외에도 시민들을 위한 영화 제작 교육과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미래 영화인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서울시민도서관을 시작으로 덕수궁, 을지로3가 맛집거리, 오!재미동 등에 이르기까지 하루를 꼬박 돌아다니며 쓴 돈은 9000원 남짓. 최저시급도 안 되는 돈으로 즐겼다고 하기엔 그야말로 호강에 가까운 코스라고 평가할 만하다. 다만 가슴 뿌듯해지는 가성비에 ‘돈 걱정 없이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더욱 늘었으면’하는 욕심이 생길 수도 있겠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지자체를 중심으로 주민들을 위한 공간과 문화 서비스가 잘 갖춰져 있다”며 “각자의 취향에 맞는 무료 공간을 잘 찾아보면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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