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에게 일주일 중 가장 행복한 요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대다수가 ‘금요일’을 선택할 것이다. 다음날이 토요일인 덕분에 금요일 밤은 묵은 피로와 스트레스를 다음날 출근 부담 없이 풀 수 있는 최고의 타이밍으로 손꼽힌다. 한 때 ‘불금(불타는 금요일)’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을 정도다. 지금도 금요일 밤만 되면 각 지역의 번화가는 ‘불금’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나라 교육 1번지로 불리는 대치동에도 엄연히 ‘불금’이 존재한다. 다만 타 지역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환한 웃음 보단 진지함 또는 엄숙함이 가득하다. 평균 연령 또한 굉장히 낮다. 대다수가 교복과 트레이닝복으로 무장한 중·고등학생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서울이나 수도권 외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이 유독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지방에서 높은 성적을 기록 중인 상위권 중·고등학생들이다. 대치동 유명학원의 특강을 듣기 위해 금요일 학교 수업을 마친 후 곧장 기차나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다. 특히 올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9~10월은 대치동 금요일 밤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대치동 파이널 현장강의(이하 현강)’가 활발히 진행되는 시기다.
주말마다 버스·기차에 몸 싣는 지방 상위권 학생들…“돈·시간 들어도 무조건 대치동”
금요일 저녁 시간대의 강남구 수서역에서는 수십 명의 고등학생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대구 ▲대전 ▲청주 ▲천안 ▲공주 등으로 다양하다. 부모나 친구와 함께 있는 학생이 간혹 눈에 띄긴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혼자다. 기차에서 내린 학생들의 손에는 참고서나 노트가 들려 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수서역에서 대치동 학원가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청주의 한 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이지민 양(18·여)은 대치동 한 학원의 수능 국어 파이널 특강을 듣기 위해 하교 후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 양은 강남구에 거주하는 어머니 친구 집에서 머물며 특강을 들은 뒤 일요일 오후에 내려갈 계획이다. 벌써 두 달째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이 양이 주말에 대치동까지 와서 수업을 듣는 이유는 서울·수도권 상위권 또래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함이다.
아들과 함께 올라온 주부 안현진 씨(47·여)는 “아이가 현재 천안북일고 1학년에 재학 중인데 수학 과목을 너무 힘들어 해 주말마다 대치동 학원을 보내고 있다”며 “대치동에 북일고 학교 내신을 전담해주는 반이 있다 보니 동급생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시간과 돈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일고에는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대치동 학원가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이 꽤 많은 편이다”고 덧붙였다.
지방에서 주말마다 대치동 학원에 가는 것은 학생의 노력이나 의지 외에 학부모의 희생도 필요로 한다. 교통비부터 학원비, 식비 등은 물론 숙박비 부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친·인척이 서울에 거주할 경우엔 숙박에 대한 부담이 어느 정도 줄어들긴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숙박비 외에도 부모 또한 주말을 온전히 대치동에서 보내야 한다. 미성년자가 혼자 숙박업소를 이용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숙박업소는 부모가 동반해도 미성년자 출입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부모 동반 출입이 가능한 대치동 인근의 강남·역삼 신라스테이, L7 강남 바이 롯데 등 3성급 이상 호텔들은 1박 비용이 30만원을 훌쩍 넘었다. 대치동 인근에 위치한 G호텔 사장 이모 씨는 “학부모를 동반해도 미성년자는 호텔에 묵을 수 없다”며 “아시다시피 이곳 상권이 학원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곧바로 유흥가가 나오기 때문에 취객들도 많고 아이들 교육 상 좋지 않은 일들도 종종 벌어져 출입을 일절 금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오는 날 한 손엔 우산, 한 손에 단어장…
학구열로 뜨거운 대치동 학원가의 ‘불금’
금요일 저녁 대치동 학원가는 수많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시대인재 ▲대치 두각 ▲이도국어 ▲미래탐구 등의 유명 학원 입구와 근처 식당들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식사 중에도 책을 펴놓고 문제를 푸는 모습을 대치동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주 금요일(18일)에도 한 손에 우산을 들고 거리를 걷는 한 학생의 손에는 영어 단어장이 들려 있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식당을 운영 중인 윤선혜 씨(51·여)는 “아이들이 학원 시간을 맞추려고 근처 식당가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거의 다 책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며 “주말엔 지방 학생들이 몰려 대기줄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주말 대치동 학원가를 찾는 지방 학생들은 크게 일반고 내신 상위권과 자사고 학생 등으로 나뉜다. 대치동 유명 학원들은 천안북일고, 전주 상산고 등 지방 명문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내신·수능 준비반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일부 중·소형 학원도 마찬가지다. 각 학원별 교육비는 상이하지만 금·토 주 2회 3시간 수업 기준 평균 40만원~50만원 사이로 집계된다. 강의 시간과 파트별 특강 중요도에 따라 학원비는 일부 차이를 보인다. 물론, 학교에 따라 교육비를 다르게 산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주 상산고는 지난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대생을 배출한 학교다. 지난해 대학입시에서 의대만 무려 157명을 보냈다. 약대·치대·한의대·수의대 등 메디컬 계열 학과까지 포함하면 총 237명에 달했다. 충청권 명문고로 꼽히는 천안북일고는 지난해 SKY대학 입학 29명, 의학계열 입학 17명을 배출했다.
지방 일반고 내신 상위권 학생들은 수능 최저 기준을 맞추기 위해 대치동을 방문한다. 이미 학교장 추천을 받은 지역균형선발전형 지원 학생들은 수능 최저학력기준 충족 시 높은 확률로 본인이 지망한 대학에 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지역균형선발전형 학교장 추천을 받기 위해선 최소 전교 5등 이내에 들어야한다. 대구에 거주 중인 최선화 씨(49·여)는 “아이가 고3인데 수능을 앞두고 혹시 긴장이 풀릴까봐 지난달부터 주말마다 올라오고 있다”며 “아이가 대구 일반고에서 내신 1.2점대를 유지하고 있어 상위 대학 수시 입학 가능성이 높아 남은 기간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맞추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수능에서 재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선 수능 최저 기준 충족을 1순위로 둬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의대 증원으로 인해 올해 N수생 응시 인원이 21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수능에 접수한 N수생은 18만1893명으로 2004학년도 이후 사상 최고치다. 통상적으로 반복학습이 중요한 수능은 N수생에게 유리한 시험으로 불린다.
대치동의 A학원 강사 김진우 씨(29·남)는 “지방에서 주말에 올라오는 학생들 대부분은 이미 학교 내신이 우수하고 실력이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로 오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가르치고 있는 제자 중 한명은 내신 1점대 초반의 청주의 일반고 학생으로 이번 수능에서 최저 커트라인만 다 맞춘다면 본인이 희망하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2025학년도 의대 지원 상황으로 볼 때 내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중 지난해에 비해 복수 합격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며 “중복 합격으로 인한 합격자이탈로 내신 합격선도 하락할 수 있기 때문에 수능 최저 등급 충족에 대한 대비가 올해 입시의 핵심이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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