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수년 전 코로나19 펜데믹 시절의 모습이 난데없이 재등장했다.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부모가 먼저 귀성을 만류했던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의 여파로 생겨난 의료대란 때문이다. 정부 정책에 반발한 의료진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전국 각 지역 병원들은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데 특히 지방의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모가 먼저 귀성을 만류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명절엔 집에 오지마” 의료대란이 낳은 난데없는 코로나 명절 분위기
서울 서초구에 사는 김정혜(37·여·가명) 씨는 추석 명절을 앞둔 얼마 전 강원도에 사는 부모님으로부터 올해는 집에 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다. 최근 발생한 의료대란 때문에 지방 의료시설들은 사실상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유였다. 혹시나 자식·손주들이 집에 왔다가 다칠 것을 우려해 올해 추석 명절엔 그나마 사정이 나은 서울에 있기를 권유한 것이다. 항상 안부전화를 할 때 마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던 부모님들이 선뜻 집에 오는 것을 만류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의료대란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
김 씨는 “평소에 손주들 보고 싶다고 거의 매일같이 이야기하던 부모님이 일 년에 두 번 밖에 없는 명절에조차 오지 말라고 말릴 정도니 지방의 의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이 간다”며 “오매불망 자식들 걱정뿐인 부모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그럼 지방에 거주 중인 부모님들에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걱정이 생겼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러다간 정말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것 같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사태가 빨리 해결돼야 한다고 본다”고 부연했다.
경기 용인시에 거주하는 장수용 씨(43·남)은 올해 추석엔 경남 함양군에 사는 부모님이 장 씨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먼저 장 씨의 집에서 모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지방에 왔다가 혹시나 사고를 당하면 병원 치료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동네에 다른 어르신들도 전부 타지에 사는 자식들 집으로 가거나 아예 따로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장 씨는 “사실 지금까진 의료대란에 대해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부모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며 “예전부터 명절 연휴가 되면 이동 인원이 늘어나면서 사건·사고도 많이 일어났는데 그런 상황에서 병원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다 하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러다가 코로나19 때처럼 전염병이라도 돌거나 수많은 사람이 다치는 사고라고 터지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
명절연휴 환자 내원수 평소의 1.9배, 지방 병원·의료원 의료진 부족에 운영차질 ‘심각’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추석 연휴에는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2배 가까이 늘어난다. 2022년 추석 당일 하루 평균 환자 내원 건수는 2만5000건으로 평상시 평일의 1.9배 수준에 달했다. 치명적 사고로 인한 응급실 방문도 평소와 비교해 크게 늘어났다. 2022년 추석 연휴에는 평소에 비해 화상이 3배, 관통상이 2.4배, 교통사고가 1.5배 각각 증가했다.
그런데 현재 전국 각 지역 병원들은 의료진 부족으로 인해 정상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보건의료노조지난 4∼9일 국립대병원 7곳, 사립대병원 23곳, 지방의료원 14곳, 특수목적공공병원 10곳, 민간중소병원 7곳 등 65곳 의료기관의 노조 지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 42곳(64.6%)은 의료공백이 발생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도 무려 18곳(27.7%)에 달했다.
급기야 추석 연휴 응급실 가동 중단 가능성이 높은 병원들도 하나 둘 등장하고 있다. 11일 기준 응급실 문을 24시간 열지 않은 병원 중 이대목동병원을 제외한 나머지 3곳(세종충남대병원, 건국대충주병원, 강원대병원)도 모두 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 지역 내 중증 환자를 책임지는 대형 병원들로 추석 연휴에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됐다. 백 의원은 “정부는 의료대란이 더 악화하지 않고 특히 추석 연휴에 어린이병원 응급실 등이 정상운영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부와 각 지자체들은 명절 연휴를 앞두고 국민의 의료불안 해소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9월 11일부터 25일까지 약 2주 동안을 ‘추석명절 비상응급 대응주간’으로 운영한다. 아울러 추석 연휴 전후 한시적으로 건강보험 수가를 인상하고, 권역응급의료센터의 전문의 진찰료를 평소의 3.5배로 올리는 등 의료인의 노력에도 보답하겠다는 방침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2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추석 연휴 응급의료 관련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의료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결코 아니다”며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응급의료 체계 유지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체 인력도 최대한 투입하고 지자체 또한 단체장 책임 하에 ‘비상의료 관리 상황반’을 설치·운영해 현장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조치토록 하겠다”며 “전국 409개 응급실에 일대일 전담 책임관을 지정해 현장 상황을 매일 모니터링도 실시할 방침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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