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보다 무서운 체념…“비리 판치는 취업, 그냥 포기 할래요”
분노 보다 무서운 체념…“비리 판치는 취업, 그냥 포기 할래요”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사진=뉴시스]

채용비리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시선이 크게 달라졌다. 감사원 조사를 통해 충격적인 전말이 밝혀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 채용비리 사태를 두고도 분노 보단 체념의 반응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기대조차 포기했다는 체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현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저버린 미래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현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직권남용·허위공문서작성 등 불법·탈법 동원해 ‘세자들’ 채용 합격시킨 선관위

 

감사원은 지난달 30일 채용비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선거관리위원회 전·현직 직원에 대한 검찰 수사를 요청했다. 이번에 수사 대상에 포함된 인원은 무려 27명이나 된다. 이들이 채용비리를 저지르기 위해 저지른 범죄는 직권남용, 위계공무집행방해, 허위공문서작성·행사, 증거인멸 등이다. 불법·탈법적 방법까지 동원된 채용비리로 인해 정당하게 실력으로 경쟁하려던 다른 후보자들이 대거 탈락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감사원에 따르면 중앙선관위와 인천선관위는 2019년 9월 단 한 명만을 뽑는 경력경쟁채용 과정에서 내부위원만으로 시험위원을 구성해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아들을 합격시켰다. 선관위 직원들은 내부 메신저에서 전 사무총장의 아들을 ‘세자’로 칭하기도 했다.

 

▲ 청년 취업설명회 현장. [사진=뉴시스]

 

충북선관위와 옥천군선관위는 2019년 11월 충북 청주시 상당구 선관위 국장의 자녀가 경력경쟁채용에 응시하자 온천군수에게 그의 전출에 동의하도록 수차례 압박해 결국 동의를 받아냈다. 해당 국장의 자녀는 충북선관위의 모든 면접위원에게 1순위로 평가받아 합격했다. 전 서울선관위 상임위원의 자녀는 면접 당시 면접위원이 평가 점수를 연필로 적은 뒤 이후 점수를 조작한 덕에 서울선관위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의 자녀는 2022년 3월 전남 선관위 경력채용 과정에서 면접위원들이 아예 평가표를 작성하지도 않았는데 최종 합격했다. 당시 전남 선관위는 채용 과정에서 외부 면접위원에게 점수 없이 서명만 기재한 평가표를 요구하는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이 밖에도 지역 선관위 경력 채용 과정에서 수많은 비리 행위가 있었는데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무려 800여건에 달했다.

 

채용비리 봐도 분노 보단 체념…“대한민국 바뀔 거란 기대 진즉 버렸어요”

 

선관위 채용비리는 불법·탈법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수단이 동원돼 ‘비리 끝판왕’이라 불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하다. 자신 또한 채용비리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유독 크게 분노했던 과거와 달리 체념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비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의미 없는 행위라며 차라리 취직을 포기하는 게 빠르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 서울의 한 대학 도서관. ⓒ르데스크

 

청년들이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올라온 댓글만 보더라도 “대한민국 절대 안 바뀜. 그냥 포기하는 게 빠름” “부모 잘 만나 그 어려운 걸 모두 해내는 의지의 한국인들” “채용비리가 선관위 뿐이냐. 민간이든 공공이든 전부 채용비리 천국이다” “어차피 공정하면 바보되는 게 한국 사회 아니냐” “이래서 난 취직을 포기했다” 등 체념 섞인 반응이 주를 이뤘다.

 

르데스크가 직접 만난 청년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 이수진 씨(22·여)는 “스펙에 비해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수가 인맥 때문인 경우가 많아”며 “처음에는 화도 나고 했는데 이젠 ‘원래 사회가 그렇구나’하고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취준생 강주원 씨(27·남·가명)는 “백날 공정한 사회 외쳐봐야 한국 사회가 바뀔 가능성 제로라고 본다”며 “그래서인지 요즘엔 ‘되면 되고 말면 말자’는 식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앞서 한 여론조사기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20·30세대 중 무려 64.9%가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0명 중 6명이 넘는 비율이다. 가장 불공정한 분야(복수응답)로는 △부동산과 금융자산 48.5% △부의 대물림 문화 38.8% △약자에 대한 갑질 37.1% △임금 등 근로소득 24.7% △채용과 승진 22.9% △교육의 기회 13.3% 등의 순이었다.

 

전문가들은 사회의 비리 현상에 대해 체념의 반응이 나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했다. ‘분노’가 희망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인 반면 ‘체념’은 포기 직전에 나타나는 감정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한 심리학자는 “감정은 보통 어떤 희망에서 비롯되는데 체념은 분노 이후에 나타나는 감정이다”며 “결국 사회의 병폐 현상을 바라보며 분노 보단 체념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어떤 희망도 갖지 않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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