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돈 최저가 행진이 빚은 한국의 ‘소탐대실’ 씁쓸한 현실
일본 돈 최저가 행진이 빚은 한국의 ‘소탐대실’ 씁쓸한 현실
▲ 세계적인 고금리 기조에도 일본만 나 홀로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면서 엔화 가치도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은 우리나라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사진은 시중은행 금고에 쌓인 엔화. [사진=뉴시스]

 

일본 화폐인 ‘엔화’ 가치 하락에 따른 한국의 피해가 심각한데도 작은 장점에 가려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하면서도 몰라서 고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일본 여행 부담이 줄고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의 학비 걱정이 줄긴 했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을 찾는 해외 여행객이 일본으로 몰리면서 우리나라 관광산업은 불황을 겪고 있다. 수출로 먹고 사는 기업들도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일본 기업들의 공세에 밀려 보릿고개를 겪고 있다.

 

800원 선까지 무너진 엔화에 때 아닌 일본여행 붐, 11월 비수기에도 일본 여행객만 급증

 

세계적인 고금리 기조에도 일본만 나 홀로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면서 엔화 가치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코로나19 시기 100엔 당 1000원대를 유지하던 엔화 가치는 지난해 초 1000원 선이 무너졌고 올해는 800원 선까지 내려앉았다. 800원 선을 유지하던 엔화 가치는 최근 일본 정부의 기준금리 인상 움직임으로 소폭 오르긴 했으나 여전히 900원 안팎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소위 ‘역대급’이라 불리는 엔저 현상으로 인해 때 아닌 ‘일본 여행’ 붐이 일고 있다. 과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진 틈을 타 일본 여행에 나서는 한국 관광객이 급격하게 늘었다. 인천공항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일본 여객 숫자(출발·도착 기준)는 130만4828명을 기록하며 역대 11월 중 가장 높았다. 항공업계에서 11월은 비수기로 분류되며 해외 여행객도 적은 편이지만 유독 일본 여행만 예년에 비해 늘었다.

 

▲ [그래픽=김진완] ⓒ르데스크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에 비해 중국이 50.9% 감소했고 동남아 역시 12.9% 줄었다. 반면 일본은 95.3% 늘었다. 엔저 현상으로 인해 가격 부담이 덜해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됐다. 일본 월간 여객 숫자는 엔저 현상이 정점을 찍은 지난 8월부터 매월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8월 124만4989명, 9월 115만225명, 10월 129만8235명 등이었다. 최근에는 단순히 관광·여행 목적 외에 명품을 구매하는 쇼핑 수요까지 늘고 있는 추세다.

 

일본 유학도 각광받고 있다. 일본 체류 비용 부담이 줄면서 일본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일본에 자녀를 유학 보낸 김선중 씨(54·남)는 “예전엔 월 생활비로 10만엔을 보내려면 한국 돈으로 100만원이 넘게 들었는데 요샌 80~90만원 가량 드는 것 같다”며 “사실상 예전에 비해 한 달 생활비 정도가 덜 드는 셈이다. 엔화가 오르기 전까지 생활비를 조금 더 보내 줄 계획이다”고 설명했다.

 

한국 여행객 줄고 수출 기업은 보릿고개…“득 보다 실이 훨씬 큰 엔화 가치 하락”

 

문제는 엔화 가치가 낮아졌다고 마냥 좋아할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엔저 현상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은 국민이 늘면서 국민 전체로 놓고 봤을 땐 득 보다 실이 더욱 큰 것으로 나타났다. 여행이나 유학의 경우 안 쓰거나 안 갈 수 있는 기회라도 있지만 국민 생계와 직결된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 인천공항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일본 여객 숫자(출발·도착 기준)는 130만4828명을 기록하며 역대 11월 중 가장 높았다. 항공업계에서 11월은 비수기로 분류되며 해외 여행객도 적은 편이지만 유독 일본 여행만 예년에 비해 늘었다. 사진은 대형서점에 쌓인 일본여행 관련 책들. [사진=뉴시스]

 

일례로 우리나라 관광업계는 엔저 현상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일본관광국에 따르면 올해 1~10월 출국일본인 수는 764만명으로 코로나 사태 전인 2019년 1~10월 대비 54.3%나 줄었다. 엔화 약세로 해외여행 경비가 늘어나면서 일본인들이 국내 여행지로 눈을 돌린 영향이다. 올해 일본인 1인당 국내 여행비용은 전년 대비 10.8% 증가한 4만1000엔(약 40만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반면 올해 우리나라 여행수지는 적자를 기록 중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10월까지 여행수지 누적 적자 규모는 100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기존에 한국을 찾던 일본 관광객 역시 기존에 비해 눈에 띄게 감소했을 뿐 아니라 엔저 현상으로 인해 일본의 체감 물가가 한국보다 저렴하다 보니 다른 나라 관광객까지 한국 대신 일본을 선택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중구 명동에서 기념품 상점을 운영하는 한 자영업자는 “확실히 예년에 비해 외국 관광객들이 늘긴 했지만 아직 코로나19 이전 수준까지는 아니다”며 “엔화가 싸서 한국에 오려던 외국인들이 일본으로 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중국인이나 중동 관광객들이 예전에 비해 줄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우리 같은 상인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관광업계 종사자 전체가 입는 피해에 비하면 일본 여행 부담이 줄어 얻은 이득은 ‘새발의 피’ 수준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

 

▲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10월까지 여행수지 누적 적자 규모는 100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기존에 한국을 찾던 일본 관광객 역시 기존에 비해 눈에 띄게 감소했을 뿐 아니라 엔저 현상으로 인해 일본의 체감 물가가 한국보다 저렴하다 보니 다른 나라 관광객까지 한국 대신 일본을 선택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사진은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명동 일대. [사진=뉴시스]

 

수출 기업들도 비상이다. 엔화 가치가 급락으로 일본 기업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탓이다.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기업들 입장에선 매출 타격이 불가피해진 셈이다. 재계 등에 따르면 일본 기업과 경쟁 강도가 높은 철강, 전자, 자동차 등의 업종이 엔저 현상의 직격타를 맞고 있다. 일본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해외 시장을 공략에 나서자 국내 철강 고객사들도 품질이 우수하면서도 가격부담이 크게 낮아진 일본산 제품에 눈을 돌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 역시 일본 기업의 거센 공세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실적 타격은 불가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에 비해 시장지배력이 낮은 한국 자동차 산업 역시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 한·일 양국 간 기술 수준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시장을 선점한 일본 자동차가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한국 자동차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점차 줄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요즘 엔화 약세 덕에 일본 여행객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리는데 사실 개개인은 모르겠지만 국가 전체로 봤을 땐 득 보다 실이 크다”며 “당장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일본 기업의 거센 공세로 수출 실적이 줄면 결국 국민 전체 소득이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엔화 약세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 전체의 자발적 노력과 범정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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